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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츠 뉴 트렌드, 2018essay 2021. 8. 7. 21:17
잇츠 뉴 트렌드 요즘 ‘소확행’이라는 말이 자주 보인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문장을 줄인 말이다. 이 문장은 내 추론이 맞는다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먼저 표현했던 문장이다. [생활속에서 개인적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크든 작든 철저한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에 마시는 차갑게 얼린 맥주 한 잔 같은 것이다. 그러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듯 문장이 세상에 표현되면 사람들은 공감하고 공감한 사람들은 ‘좋아요’를 누른다. ‘좋아요’를 눌린 게시물들은 공유되고 그 문장은 더 널리 빠르게 퍼져나간다. 그리고 그 문장은 이내 길거리에서 볼 수 있게 된다. 맛있고 저렴한 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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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글, 2018essay 2021. 8. 7. 21:15
서울의 글 오래살던 동네를 떠나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됐다. 1월에 시작했으니 약 10개월이 지났다. 동네에서 매일같이 ‘서울’을 염원하고 이 동네를 뜰거라고, 맨정신에 그리고 취했을 때 입이 마르고 닳도록 다짐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재수가 좋아 대학교도 동네에서 해결봤었다.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기억이 많이 쌓여있고 기억들은 물론 좋은 기억들도 있지만 그만큼 슬프고 잊고싶은 기억들도 있었다. 그 모든 걸 뒤로하고 싶었다. 성공하면 다 모르는 척 할 수 있거나 안주삼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롭게 살고싶은 마음이랄까. 새로운 학교에 전학생으로 살고싶기도 했고 영화 의 알리처럼 정착하지 않고 떠나는 사람이고 싶기도 했던 것 같다. 서울에 가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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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기, 2021fiction 2021. 8. 6. 16:11
오늘 일기 * 다음 글을 클릭했다. 벌써 열두 번째 포스팅이었다. 세 번째 포스팅에선 ‘선화 님을 이웃추가하고 새 글을 받아보세요’라는 알림 창이 떴고 나는 혹시나 잘못 누를까 눈을 똑바로 뜨고 정확히 ‘취소’라는 글자의 중앙을 눌렀다. 네이버에서는 일상 포스팅을 하는 유저들을 독려하기 위해 매일 일기를 쓰면 현금처럼 쓸 수 있는 포인트를 지급해 주는 이벤트를 했다. 일상 포스팅을 쭉 써오던 사람들보다 나같이 돈이 목적인 사람들이 훨씬 많이 참여한 것 같긴 했지만, 아무튼. 나머지 포스팅은 내일 보기로 하고 우선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날 꿈엔 은하가 나왔다. 은하는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어깨 정도에서 삐죽삐죽 바깥으로 뻗은 머리를 하고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은하에게 다가가 어디로 가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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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크레딧, 2021fiction 2021. 8. 6. 15:54
엔딩 크레딧 종환은 선우를 소개로 만났다. ‘내 주변에 너처럼 영화 진짜 좋아하는 애가 하나 있는데••• 만나볼래?’가 선우에 대한 말이었다. 선우는 영화에 대해 꽤 많이 알았다. 영화를 말하면 감독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 감독의 예전 스타일이 어땠는지, 어떤 기법을 사용했는지, 그 감독의 유년기는 어땠는지까지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종환은 선우와 연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도록 그런 연애를 꿈꿔왔기 때문에. 카페에 앉아서, 길을 걸으면서, 술을 마시면서, 알몸으로 나란히 누워 천장을 보면서 영화 얘기를 하는 연애. 설명하지 않아도 착착 알아듣는 애인. 둘의 사이는 빠른 속도로 깊어져갔다. 종환은 선우와 함께 영화제에 갔다. 거기엔 영화관이 모여있었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관계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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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주세요, 2021fiction 2021. 8. 6. 15:53
더 주세요 * 소시지 두 개, 양파와 피망 세네 조각이 은하의 반찬 칸에 담겼다. 은하가 고개를 들어 흰색 옷을 입은 중년의 여자를 쳐다봤다. “헐 이것밖에 안 줘요?” “아니 이게… 양이…” “좀만 더 주세요” 중년 여자가 곤란하다는 듯 오른쪽 끝에 서있는 젊은 여자를 흘끗 본 후, 소시지 두 개를 더 담았다. 뒤이어 영지였다. 영지에게도 소시지 두 개, 양파와 피망 세네 조각이 담겼다. 중년 여자가 슬쩍 영지의 눈치를 봤다. 영지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듯 숙여 짧게 인사한 후, 몸을 왼쪽으로 옮겼다. 은하의 뒤를 따라 걸었다. 빈자리에 앉았다. “진짜 조금 준다. 오늘 먹을 거 이거밖에 없으면서 소시지 두 개가 뭐냐. 어 뭐야, 너 더 달라고 안 했어?” “응 그냥 어차피 오늘 맛없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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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2020fiction 2021. 8. 6. 15:49
장마 106일째 비가 내리고 있다. 어떤 날은 부슬비였고, 어떤 날은 폭우였다. 그렇지만 단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내리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지갑, 핸드폰에 이어서 우산을 필수적으로 챙겼다. 더 이상 예전처럼 어딘가에 우산을 놓고 오는 일은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언제나 비가 오고 있으니까. 누구도 우산을 놓고 가지 않았다. 우산의 종류는 다양해졌다. 튼튼한 우산, 아름다운 우산, 노약자가 들 수 있는 가벼운 우산, 방수가 더 잘 되는 우산, 수납이 간편한 우산 등등. 그에 따라 가격대도 다양해졌다. 여름이었지만 덥지 않았다. 그늘을 찾아야 했던 여름은 사라졌다. 모든 곳이 그늘이었으니까. 어쩌다 가끔 낮에만 봄처럼 따뜻했고, 아침저녁으로는 항상 서늘했다. 고로 장갑의 판매율이 좋아졌다. 장시간 우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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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번째 절기, 2020fiction 2021. 8. 6. 15:48
스물두 번째 절기 “달력이 따로 없네” 영원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내리며 혼잣말로 말했다. 사람들은 여름이 끝나갈 때면 여름 내 놀러 갔던 바다, 먹었던 음식, 여름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 등을 묶어 ‘여름아 잘 가’라는 뉘앙스의 캡션과 함께 올렸다. 몇몇은 다가올 가을을 반기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보통 이러면 사진은 작년 가을 사진이었다. 기상예보에서 오늘이 동지(冬至) 임을 알렸다. 일 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긴 날. 실시간 검색어에는 ‘팥죽 만드는 법’이 3위에 올라와 있었다. 내일은 인스타그램에서 팥죽을 보겠구나. 영원이 생각했다. 지나간 시간. 영원은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다 지나간 남자들을 떠올렸다. A랑은 손을 잡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고, H와는 술에 취해 하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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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 원호, 2020fiction 2021. 8. 6. 15:47
지현, 원호 지현은 애연가였다. 사교를 목적으로 담배를 열심히 학습했던 원호와는 달랐다. 원호와 지현이 처음 만났을 때는 어색할 때마다 담배를 피웠다. 원호는 그때마다 배우길 잘했다고 생각했었다. 지현은 그걸 알았다. 그래서 지현은 ‘담배 피우고 오자’라고 말하지 않고 ‘나 담배 하나만 피고 올게’라고 말했다. 그중 몇 번은 같이 나가자고 했는데, 그럴 때면 ‘자기도 피우게?’라고 물었었다. 원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지현도 느린 속도로 끄덕였다. 왠지 지현은 담배를 피울 때면 지현 그대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부스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 부스 안에는 아무나 들이지 않는 것 같았고, 원호도 거기에 포함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지현이 아무리 가까이에 서있어도 한 발짝도 가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