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두 번째 절기, 2020fiction 2021. 8. 6. 15:48
스물두 번째 절기
“달력이 따로 없네”
영원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내리며 혼잣말로 말했다. 사람들은 여름이 끝나갈 때면 여름 내 놀러 갔던 바다, 먹었던 음식, 여름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 등을 묶어 ‘여름아 잘 가’라는 뉘앙스의 캡션과 함께 올렸다. 몇몇은 다가올 가을을 반기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보통 이러면 사진은 작년 가을 사진이었다. 기상예보에서 오늘이 동지(冬至) 임을 알렸다. 일 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긴 날. 실시간 검색어에는 ‘팥죽 만드는 법’이 3위에 올라와 있었다. 내일은 인스타그램에서 팥죽을 보겠구나. 영원이 생각했다.
지나간 시간. 영원은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다 지나간 남자들을 떠올렸다. A랑은 손을 잡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고, H와는 술에 취해 하룻밤 섹스를 했었다. J와는 연애를 잠깐 했지만 J가 당시의 외로움을 달랠 충동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에 한 달만 사귀고 이별 통보를 받았으며, K와는 왠지 서로 마음에 드는 섹스였어서 4번 정도를 잔 후에 연락을 끊었다. 이 외에도 두 명의 남자들이 더 있었지만 손도 잡지 않았으니 카운팅에서 제외했다. 이번 연도도 별 볼 일 없는 관계의 연속이었다.
오늘은 밤이 가장 긴 날이니, 낮이 가장 짧은 날이기도 했다. 영원은 오늘 낮을 꼭 기억하겠다고 다짐했다. 오후 반차를 내고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카페에 갔다. 나무로 된 바닥에선 끼익-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불안감을 만들어내는 뉘앙스는 아니어서 사람들은 편하게 지나다녔다. 영원은 노트북으로 이번 연도에 찍었던 사진을 훑어봤다. 작년에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이번 연도에는 수많은 사람과 헤어졌다. 작년엔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느라 영원이 불편했었고, 이번 연도에는 영원이 편하기 위해서 남들에게 불편하다 못해 아플 말들도 서슴없이 했다. 그만큼 작년엔 많이 울었고 이번 연도엔 덜 울면서 살고 있지만, 마찬가지로 웃음도 작년에 많았기에 영원에겐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맴돌았다.
남은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광화문 일대를 걸었다. 낮이 짧다더니 금세 어두워질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안국에 다다랐을 땐 5시쯤이었는데, 거의 8시 같았다. 잠깐 벤치에 앉아 인스타그램을 켰더니 정말 팥죽 사진이 몇 개 올라와 있었다. 영원은 사람들에게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그때, H에게 연락이 왔다. 기억에서 잊고 살던 사람이라 이름이 떴을 때 영원의 몸이 순간적으로 핸드폰과 조금 더 가까워졌다.
[영원아 잘 지내? 그땐 내가 미안했어... 그때 내가 일이 조금 많았어가지고 미안해]
H가 당시에 일이 많았다는 걸 설명하는 게 웃겼다. 어차피 원나잇이었으면서 멘트하고는. 영원은 답장하지 않고 일어나서 다시 걸었다. 점점 날씨가 추워졌다. 이미 영원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멘탈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뜬금없이 속 보이게 연락하다니. 영원은 원래 가려던 식당을 가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언젠가 선물 받았던 와인을 꺼냈다. 좋은 날에 먹겠다고 미뤄왔었는데, 생각해보니 안 좋은 날 먹고 기분을 낫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잔에 와인을 따랐다.
H의 메시지를 다시 봤다. 이 초저녁에 왜 연락했을까. 낮술 마셨나. 지금은 누구한테 연락 돌리고 있으려나. 나는 몇 번째 연락이었을까. 답을 알아도 의미 없을 질문들을 생각하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때, K에게 인스타그램 팔로우가 왔다. 잘못 누른 걸까 싶어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최근 사진 몇 장에 좋아요를 눌렀다. K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다. 길었던 머리를 짧게 자른 게 K의 근황이었다. 우연히 넘긴 다이렉트 메시지 창에 ‘요청 1개’라는 글자가 떴다.
[잘 지내..? 여전히 서대문 그쪽 살아?]
K는 다급하게 ‘보고 싶어서 연락했어 미안해’라는 말을 덧붙였다. ‘잘 지내?’로 시작해서 ‘미안해’로 끝나는 메시지를 하루에 두 번이나 받다니. 영원은 파트너였던 K에게는 답장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인스타그램 피드에 여자친구 사진이 있는 걸 보고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기운이 빠지고 있었다. 아마도 과거가 흘러들어온 탓이었다. 냉장고에 있던 초콜릿을 꺼냈다. 당을 보충하며 다시 마음을 제자리로 돌리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을 제자리로 돌리기엔 술이 필요했고, 와인 한 병을 빠르게 비웠다. 두 번째 술은 편의점 싸구려 와인이었다. 점점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고 소파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갑자기 어떤 느낌이 들어 영원이 눈을 번뜩 떴다. 소파 한편에 널브러진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전화가 오고 있었고, J의 번호였다. 이번 연도에 만난 남자 중에 유일하게 번호를 기억한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왠지 모를 반가움에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에는 시끄러운 차소리와 함께 J의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술 마시고 전화해서 미안”
“그래 잘 지내”
하루 종일 ‘미안해’를 여러 번 들은 걸 떠올리니 머리가 살짝 어지러워졌다. 영원은 이번 연도 시장에 팥이 상한 채로 판매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날 밤은 모두에게 똑같이 길었고, 모두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팥이 상한 게 아니라 그저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이었다. 모두의 마음에 과거가 흘러들어간 밤. 검색창에는 ‘팥죽 만드는 법’이 5위로 내려가 있었다. 그래도 창밖은 여전히 깜깜했다. 고백을 하기에 가장 분명하게 좋은 밤이었다.
'fic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주세요, 2021 (0) 2021.08.06 장마, 2020 (0) 2021.08.06 지현, 원호, 2020 (0) 2021.08.06 넌 아직도 네 아빠를 믿니, 2020 (0) 2021.08.06 첫 번째 인사 두 번째 학교, 2020 (0) 2021.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