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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없는, 2021fiction 2021. 9. 13. 21:51
대학시절엔 참으로 여러 애들이 있었다. 집이 잘사는 애들, 운동권에 관심이 많은 애들, 지나치게 우울하거나 지나치게 밝은 애들, 이성과 끊임없이 관계를 가지는 애들, 항상 술에 취해있는 애들, 담백하려고 노력하는 애들. 나를 객관적으로 판단해보자면 맨 마지막 부류였다. 담백하려고 노력하는 애들. 나와 같은 부류로 진권이 있었다. 진권과 나는 딱히 얘기를 꺼내진 않았지만 우린 완벽한 팀이었다. 진권과 나는 다른 애들이 가는 네온사인 간판에 유행가를 트는 술집에 가지 않고 동네 아저씨들이 가는 텔레비전이 틀어진 호프집에 갔다. 유행하는 패션을 따라 하지 않고 홍상수 영화 속 주인공처럼 입으려고 노력했다. 애들이 줄임말을 쓸 때 우리는 최대한 늘이고 늘여서 말했으며 어떤 감정이 들어도 덜고 덜어서 약간 체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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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비 라이프 (Plan B Life), 2021fiction 2021. 9. 13. 21:50
플랜비 라이프 (Plan B Life) * 그녀의 습관은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계획의 즐거움을 즐겼다기보단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의 좌절감을 느끼는 걸 싫어한 게 컸으니 좋아하는 일이라기보단 습관에 더 가까웠다. 그녀는 늘 계획을 세웠다. 물론 그 계획대로 되지 않을 시에 이행할 플랜비(Plan B)까지. 그러므로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일은 연애였다. 4살 연상의 남자와 연애를 할 때였다. 그날은 서로 바빠 약 보름 만에 만나는 날이었다. [우리 오랜만에 보니까 점심쯤에 여기서 파스타를 먹고, 수목원에 구경 갔다가… 여기 카페 갔다가 마지막엔 자기네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 시켜가지고 영화 보면서 먹자] 몇 장의 사진을 첨부하면서 그가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그가 말한 곳들을 지도로 찍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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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의 개근상, 2021fiction 2021. 9. 13. 21:48
성미가 10살 때의 일이었다. 성미 엉덩이에 종기가 났다. 어쩌다 얼굴에 하나씩 나는 여드름과는 달랐다.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로 엉덩이가 아파 엎드려서 자야 마땅했다. 성미 엄마는 종기를 면봉으로 짜줬는데, 일시적으로만 없어질 뿐 자고 일어나면 오히려 더 번져있었다. 상태는 더 심각해져서 걷는 자세도 어정쩡해졌다. 월요일이 됐고, 성미는 오늘도 어김없이 잠을 설쳤다. 피곤하고 짜증 나고 슬픈 감정이 얼굴에 가득한 채로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성미 엄마는 그런 성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수건을 들고 머리를 말려주고, 로션을 발라주고, 책가방을 챙겨줬다. “엄마… 나 너무 아픈데 학교 안 가면 안 돼?” 성미 엄마는 마음이 아팠다. 성미 엄마는 성미를 끌어안고 말했다. “성미야 그래도 학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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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 수아 2021fiction 2021. 9. 13. 21:47
“넌 아무나 사랑하잖아” “넌 아무도 사랑 못 하잖아” 수아와 수현이 그렇게 서로를 쏘았다. 수아와 수현은 9분 차이의 일란성 쌍둥이다. 수아가 먼저, 수현이 나중에. 얘기 첫 시작은 수아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본 옷을 수현에게 보여주며 ‘이 옷 예쁘지 않냐? 사서 같이 입을래?’였는데 어느덧 둘은 이런 말을 내뱉고 있었다. 수아가 수현에게, 넌 아무나 사랑하잖아. 수현이 수아에게, 넌 아무도 사랑 못 하잖아. 분명 둘의 생김새는 아주 비슷했으나, 묘하게 수현만 인기가 있었다. 뭐랄까, 눈빛이나 말투의 뉘앙스가 달랐다. 수아가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헤어질 때 아무 목적 없는 목소리로 ‘잘 가! 오늘 재밌었어!’라고 한다면, 수현은 ‘오늘 재밌었는데... 가려니까 조금 아쉽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수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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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기, 2019essay 2021. 8. 7. 21:56
다시 보기 1 고등학생 때 윤성현 감독의 이라는 한국 영화를 봤다. 이 영화는 내가 너무 많이 좋아해서 그 당시에도 여러 번 반복해서 보고 스무 살이 넘어서도 몇 번을 더 봤다. 거짓 안 보태고 총 열 번은 봤을 거다. 처음에 봤을 당시엔 독립영화를 처음 접한 터라 이런 영화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혔는데, 더 신기한 건 다시 볼 때였다. 처음 봤을 땐 보이지 않던 장면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성인이 되고 나선 고등학생 때 이해되지 않았던 대사가 이해됐다. 그래서 백희만 이해됐던 첫 감상과 다르게 기태도 이해됐고 나중엔 동윤이도 이해가 됐다. 짧지 않은 시간에 걸쳐 거듭해서 보다 보니 이런저런 시선에서 모든 인물과 장면이 이해가 됐다. 거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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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사물들, 2019essay 2021. 8. 7. 21:54
어제의 사물들 1 난 옷과 신발을 사게 되면 처음 샀을 때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들을 일절 하지 않는다. 소위 말해 막 입는 편이고 책도 그렇다. 가지고 다닐 때는 이것저것 다 들어간 가방에 쑤셔 넣어 모서리 여기저기가 낡고 읽으면서 좋은 부분은 펜으로 밑줄도 치고 책날개가 없으면 페이지를 접어놓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마음은 사물이 내 손을 타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서이다. 처음 같은 새 상품의 퀄리티가 아니더라도 괜찮다. 그 스크래치와 주름 모두 내 것이 되어 히스토리를 가지는 것 같아서 나에겐 그 모습이 더 아름답게 다가온다. 2 언젠가 사진을 불에 태운 적이 있었다. 잊고 싶은 시간이 담겨있던 사진이라 불에 태웠는데 막상 불에 타고 있는 사진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가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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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비밀, 2019essay 2021. 8. 7. 21:43
솔직한 비밀 나의 부모님은 맞벌이였고, 나는 늦둥이로 태어났다. 나는 위로 오빠가 한 명 있고, 13살 터울이 난다. 13살이라는 말을 들으면 실감이 안 나겠지만, 상상해보자. 내가 7살 때 나의 오빠는 20살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빠와도 생활패턴이 전혀 맞지 않아서 정말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처음엔 무서워서 집에 돌아오면 우는 일이 내 일과였는데, 몇 번 울어보니 아무리 울어도 엄마 아빠는 퇴근시간이 돼야 오신다는 걸 알았다. 즉, 울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에는 뭐라도 계속 생각하려고 했다. 있었던 일, 좋은 노래 같은 거 말이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렇게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해져 갔다. 자라면서는 두 분 다 집을 비우시는 날이 생기면 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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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가 될 수 없는 하나 (One can’t be all), 2019essay 2021. 8. 7. 21:39
전부가 될 수 없는 하나 (One can’t be all) 얼마 전 타투이스트친구(@hate_charlie)에게 오른쪽 옆구리에 타투를 받았다. 지금 내 아이디인 it was reality를 빨간색으로 새겼다. 타투라고 하면 후회하지 않을 것, 영원히 사랑할 것을 해야 된다는 생각이 있겠지만 사실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저 내 이번 책 제목이기도 했고 타투이스트 친구에 대한 응원이기도 했고 그냥 타투가 하고 싶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다양한 마음으로 타투를 했다. 나는 아이디를 자주 바꾼 편이다. 수많은 아이디를 거쳤다. 기억이 나는 아이디부터 이야기해도 다섯 개가 넘는다. figfromfrance(검정치마 노래), riverinwood(산책에 빠졌던 때), sleeptight(E sens 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