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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가 될 수 없는 하나 (One can’t be all), 2019essay 2021. 8. 7. 21:39
전부가 될 수 없는 하나 (One can’t be all)
얼마 전 타투이스트친구(@hate_charlie)에게 오른쪽 옆구리에 타투를 받았다. 지금 내 아이디인 it was reality를 빨간색으로 새겼다. 타투라고 하면 후회하지 않을 것, 영원히 사랑할 것을 해야 된다는 생각이 있겠지만 사실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저 내 이번 책 제목이기도 했고 타투이스트 친구에 대한 응원이기도 했고 그냥 타투가 하고 싶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다양한 마음으로 타투를 했다.
나는 아이디를 자주 바꾼 편이다. 수많은 아이디를 거쳤다. 기억이 나는 아이디부터 이야기해도 다섯 개가 넘는다. figfromfrance(검정치마 노래), riverinwood(산책에 빠졌던 때), sleeptight(E sens 노래), attitudesbecomeform(하랄트제만의 태도가 형식이 될 때), itwasreality(attitudesbecomeform보다 짧은 아이디로 살고 싶어서 생각해 낸 문장), 심지어 이 전에는 a half trace라는 아이디로 작업을 해왔었다. 그런데 나는 왜 아이디를 바꿨을까? 아이디가 나에게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니고 아이디때문에 괴로운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왜 아이디를 티비 채널 돌리듯이 바꿨을까?
내 아이디는 검정치마 노래와 이센스 노래였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이따금 맥 드마르코를 좋아하는 뮤지션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뱃사공 노래도 좋아하고 산울림 노래도 좋아한다. 또 나는 SKY캐슬도 재밌고 쇼미더머니도 재밌고 레오까락스 영화도 재미있다. 그러다 영화감독 누구 좋아하냐는 질문을 들으면 ‘저 쿠엔틴 타란티노요’라고 대답하는 날도 있다가 어떤 날엔 ‘저 이창동이요’라고 대답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난 먼저 말한 쿠엔틴 타란티노라고 말했어야 됐던 걸까? 하나의 대답을 정해야 했을까?
하지만 난 진실로 검정치마와 뱃사공을, 쇼미더머니와 레오까락스 영화를 거의 같은 크기로 사랑한다. 이 중 가장 사랑하는 걸 고찰해 하나를 정해서 나를 정의하거나 표현할 수 있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그건 오히려 고집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선별적으로 선택된 모습만 보여주는 건 오히려 컨셉질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삶과 마음엔 다면성이 존재한다. 신념이 고집으로 바뀌게 되면 그 어떤 가능성도 배제되어버리고 아마 전보다 더 괴롭고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영화 <헤드윅>에선 이런 대사가 있다. ‘Deny me and be doomed’ 자신을 부정하면 파멸하리라. 자신이 선택한 부분이 전부가 될 수 없고, 선택하지 않은 부분이 소멸할 수는 없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 중에 제일 사랑하는 것이 자신이기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에 가깝다. 다시 말해 타투까지 했지만, it was reality가 나인 건 아니다. 나를 거쳤던 모든 아이디가 나였다.
솔직해지자는 글이기도 하고 자신을 인정하자는 글이었다. 우리가 솔직하게 우리를 인정해도 별일 일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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