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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요 없는, 2021
    fiction 2021. 9. 13. 21:51

    <필요 없는>


    대학시절엔 참으로 여러 애들이 있었다. 집이 잘사는 애들, 운동권에 관심이 많은 애들, 지나치게 우울하거나 지나치게 밝은 애들, 이성과 끊임없이 관계를 가지는 애들, 항상 술에 취해있는 애들, 담백하려고 노력하는 애들. 나를 객관적으로 판단해보자면 맨 마지막 부류였다. 담백하려고 노력하는 애들.

    나와 같은 부류로 진권이 있었다. 진권과 나는 딱히 얘기를 꺼내진 않았지만 우린 완벽한 팀이었다. 진권과 나는 다른 애들이 가는 네온사인 간판에 유행가를 트는 술집에 가지 않고 동네 아저씨들이 가는 텔레비전이 틀어진 호프집에 갔다. 유행하는 패션을 따라 하지 않고 홍상수 영화 속 주인공처럼 입으려고 노력했다. 애들이 줄임말을 쓸 때 우리는 최대한 늘이고 늘여서 말했으며 어떤 감정이 들어도 덜고 덜어서 약간 체념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니 진권과의 연애는 지금 생각해 봐도 참 누가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다. 진권이 내게 고백했으나 내가 고백을 망설인 것뿐이니 어쩔 수 없이 진권과 만난 것도 아니었고, 사귀고 나서는 우리의 관계를 내가 훨씬 자랑하고 다녔기 때문에 관계의 시작이나 유지에 관해서 말하면 둘 다 할 말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 우리를 사람들은 꽤 좋게 봤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즐겼다. 그래서 서로에게‘사랑해’라는 말 대신 ‘지금 세상에 너랑 나밖에 없는 것 같아’라는 식으로 말하자면 조금 특별하게 표현하는 걸 즐겼다.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를 남친/여친으로 말하기보단 ‘애인’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건 기본이었다.

    우리는 빈티지 옷을 입고 동네 호프집에서 예술 얘기를 하다 술에 취하면 한 명의 집에 가서 같이 잠들었다. 텍스트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데이트였지만 거기엔 여러 가지가 생략됐다. 우리가 입은 빈티지 옷이 물론 나쁘진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는 가진 돈이 넉넉하지 않아서 선택한 취향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직접 선택한 것처럼 말하고 다녔다. 호프집의 분위기도 물론 좋았지만 난 호프집의 화장실이 더러워 가끔은 네온사인에 유행가가 나오는 술집이 탐나기도 했었으며, 잠들기 전에 우리는 씻지도 않은 몸으로 콘돔을 더듬어 찾고는 성욕을 해결한 뒤 서로 등을 돌리고 잠들었다. 섹스가 끝나면 약속이라도 한 듯 등을 휙 돌리고 핸드폰을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진권과 나의 본능이 튀어나올 때. 예를 들면 술에 취했을 때, 섹스 전후.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우리를 너무 좋게 봤다. 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뿐이었지 계속 사랑하고 있는 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이 좋게 보니 여차여차 이별을 미루게 됐다. 그리고 그렇게 무엇보다 그때까지 신입생이나 복학생, 여러 자리에서 괜찮은 사람을 찾지 못했던 게 제일 큰 이유였다. 우리는 점점 사람들 앞에서 서로를 유독 더 많이 사랑하고 단둘이 있을 때면 쉽게 짜증을 부렸다. 어떤 때는 정말이지 이 관계를 끝내고 싶으면서도 정말로 끝날까 봐 두려워 미칠 노릇인 시기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연애를 유지했다. 그건 어떤 마음이었을까. 우리의 이미지와 우리의 연애는 도대체 어떤 상관관계가 있었던 걸까.

    *

    진권과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헤어졌다. 더 이상 우리의 사랑을 볼 사람들이 없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 5년이 흐른 뒤 우연히 진권을 마주쳤다. 합정 교보문고였는데, 진권도 나도 혼자 있어서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술을 한잔하기로 해서 우리는 자연스레 예전 습관대로 골목의 호프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웬걸 호프집에 웨이팅이 있었다. 각양각색의 예쁘고 잘생긴 남녀들이 호프집 바깥으로 줄을 서 있었다. 진권은 당황했고, 나는 맞은편에 네온사인 간판인 술집을 가리키며 들어가자고 했다. 우리가 한 번도 들어간 적 없는 타입의 술집. 술집에 들어가서 진권은 조금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였는데 나는 그런 진권의 모습이 역겨웠다.

    “요즘 노포 스타일 술집 사람들이 좋아해서 저 술집이 만석인가 봐”

    내가 말했다. 진권에게 이제는 저런 곳도 사람들이 알기 시작했다고 알려주고 싶어서 말했다. 너와 내가 아닌 사람들도 이젠 저런 곳을 갈 수 있다고.

    “우리가 진짜 예전부터 다녔었는데”

    “그렇다고 저 가게가 우리 건 아니지. 그냥 돈 낸 손님이지”

    진권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더 설명하지 않고 진권에게 물을 따라주었다. 진권은 나에게 만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고, 그렇다는 나의 대답에 적잖이 놀란듯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는 진권의 질문에 모두 대답을 했다. 나보다 3살이 많은 평범한 직장인. 진권은 어떤 기대감을 내려놨는지 편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네가 그런 평범한 사람 좋아하는 줄 몰랐네”

    “넌 뭐하고 지내는데? 지금도 예술해?”

    나의 톡 쏘는 말에 진권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그러면서도 진권은 아는 형이… 아버지가… 그래서 친구랑… 이런 식으로 말을 늘였다. 결과적으로는 무언갈 준비 중이라는 말이었는데 딱히 더 묻지 않았다. 진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체면이니까. 취기가 오른 진권은 점점 이 가게가 자신이 싫어하는 스타일의 가게라는 사실이 상관이 없는 듯했다. 그저 술만 더 있으면 됐다. 진권은 본능대로 내 옆에 와 내 손을 잡고 어깨를 어루만졌다. 내가 계속 받아주지 않자 진권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조금 과장되면서도 담백한, 옛날의 그 어조로 말했다. 나도 그때의 어조로, 다른 말을 뱉었다.

    “아무래도… 그때랑은 다르지”

    진권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제 그만 일어나자고 했다. 우리는 술집을 나왔다. 거리에는 아까 서서 기다리던 커플들이 취기가 조금 오른 상태로 서로의 몸을 가까이하곤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통해 진권과의 옛날 모습을 떠올렸다. 가게 쇼윈도에 비친 우리를 슬그시 바라봤다. 둘이 닮았다는 말도 자주 듣던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고 전혀 다른 모습을 한 나와 진권의 실루엣이 어둡게 그을려있었다. 나는 호프집 근처의 골목 사이사이 나와 진권을 닮은 연인들이 있는지 찾게 됐다. 나와 진권같이 서로를 닮아 완벽하게 잘 어울리는 연인들. 저 사람들 중에서도 옛날의 우리처럼 취해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정말로 서로를 사랑하고 있을까. 정말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까. 알 수도 없고 만약 안다고 해도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사실이지만 잠깐 동안은 알고 싶어졌다. 뒤따라오는 진권의 얼굴이 네온사인으로 잠깐 반짝였다. 그 너머로 어설프게 어두운 골목에서 아까 보았던 연인들이 조금 더 가까워져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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