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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기, 2021fiction 2021. 8. 6. 16:11
오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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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을 클릭했다. 벌써 열두 번째 포스팅이었다. 세 번째 포스팅에선 ‘선화 님을 이웃추가하고 새 글을 받아보세요’라는 알림 창이 떴고 나는 혹시나 잘못 누를까 눈을 똑바로 뜨고 정확히 ‘취소’라는 글자의 중앙을 눌렀다. 네이버에서는 일상 포스팅을 하는 유저들을 독려하기 위해 매일 일기를 쓰면 현금처럼 쓸 수 있는 포인트를 지급해 주는 이벤트를 했다. 일상 포스팅을 쭉 써오던 사람들보다 나같이 돈이 목적인 사람들이 훨씬 많이 참여한 것 같긴 했지만, 아무튼. 나머지 포스팅은 내일 보기로 하고 우선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날 꿈엔 은하가 나왔다.
은하는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어깨 정도에서 삐죽삐죽 바깥으로 뻗은 머리를 하고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은하에게 다가가 어디로 가냐고 물었는데, 처음엔 듣지 못하다가 내가 어깨를 살짝 건드리니 그제야 나를 발견했다. 어디 가? 내가 물었고, 모르겠어,라고 은하가 대답했다. 정신을 차리니 지하철이 도착해있었고 은하가 거기에 탔다. 나는 타지 않았다. 아니 타지 못했다. 왠지 내가 탈 지하철이 아닌 것 같았다. 은하는 빠른 속도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라졌다.
내 방은 유난히 해가 많이 들었다. 물론 장점이긴 했지만 방이 지나치게 더워졌고, 여름에는 그 빛 때문에 상당히 이른 시간부터 더러운 기분으로 깨는 날이 잦았다. 그래서 암막 커튼을 중고로 사서 방에 달았다. 내 방은 조금 시원해지고 많이 어두워졌다. 엄마는 그런 내 방을 싫어했다. 사내자식이 이렇게 살면 홀아비 냄새가 날 거라고 했고, 햇빛이 잘 드는 이 집을 사느라 본인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곤 했다. 나는 그런 말들이 마치 반찬인 것처럼 밥과 함께 씹어넘겼다.
나는 늦은 나이에 군대를 다녀왔고, 학교는 졸업을 유예했다. 아르바이트라도 하라는 부모님의 말에 나는 잠깐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그 돈도 친구들과 술을 몇 번 먹으니 금세 사라졌다. 어쩌면 그래서 암 막커튼이 필요했는지도 몰랐다. 아침이 다 돼서 들어와가지곤 낮까지 자는 한심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날도 밥을 먹으며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 다시 침대에 누워 선화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선화와는 중학생 때 알게 됐고 고등학교도 같았다. 근데 이 블로그가 정말 내가 아는 선화가 맞나? 글을 전체적으로 보면 선화가 맞는 것 같은데, 얼굴 사진이 없었다. 여자들은 그래도 자기 사진이 한두 장 정도는 있던데 선화는 정말 얼굴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었다. 혹시 놓쳤나? 나는 스크롤을 내려 어제 봤던 글을 다시 눌렀다. 이번에도 하단에 ‘선화 님을 이웃추가하고 새 글을 받아보세요’라는 메시지가 떴고, 나는 홀린 듯 취소가 아닌 ‘추가’의 정중앙을 눌렀다.
구인구직 사이트를 보다가 동네 개천으로 산책을 나갔다. 걸으면서 그 블로그가 내가 아는 선화라고 짐작한 이유는 우선 동네였다. 잘은 모르지만 선화가 사는 동네가 그 동네쯤이었다. 그리고 어떤 게시물에 언뜻 밝힌 나이가 나와 같은 나이, 선화의 나이였다. 사실 이거만 가지고 확신하기도 애매했지만 그 나이에 ‘선화’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은 정말로 내가 아는 ‘선화’밖에 없을 확률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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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내 잠을 깨운 건 선화 님이 나에게도 이웃추가를 했다는 알림이었다. 나는 내가 벌린 일이면서도 괜스레 당황을 했다. 다급히 내 블로그를 살폈다. 친구들과 여행을 갔던 사진들이 세 페이지 정도 있었고 가끔씩 뻘소리를 끄적인 게 한 페이지 정도 있었다. 카테고리 이름은 ‘1’, ‘2’로 단순했다. 다행히 흑역사로 취급되어 면 빠질 일은 없었다. 팝업창이 떴다. [선화 님이 ‘190504’에 댓글을 달았습니다. 혹시 **고등학교 윤상원이 맞나요? ㅎㅎ 나 유선화인데 기억해? 혹시 아니라면 죄송합니다^^] 바로 답글을 달았다. [맞아 ㅋㅋ 기억해 오랜만이다] 선화는 혹시 괜찮으면 카카오톡 아이디를 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내 아이디를 알려줬고, 그러면서 옛날에 연애를 시작할 때 느꼈던 그런 기분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시간을 따져보니 벌써 2년하고도 두 달이 지났다. 은하와 했던 연애. 은하와 나는 3년 동안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다 결국엔 헤어졌다. 은하는 스물두 살때 국숫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났다. 내가 8개월 차였고, 은하는 갓 들어온 신입이었다. 그때 나는 은하를 가르쳐야 했고, 은하는 나를 많이 따르고 작은 실수에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여러 번씩 사과를 했다. 나는 서투른 은하를 챙겨주고 싶었고, 은하는 내가 든든해 기대고 싶다고 했다. 그러던 은하가 날 떠난 건, 내 실체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대학이 끝날 때가 되니까 패배자의 마음으로 모든 것에 비관적이 된 나는 세상뿐만 아니라 은하에게도 시니컬하게 굴었다. 하루는 은하가 밥을 먹다가 ‘오빠 제발… 먹을 때만이라도 그냥 생각 없이 웃으면서 먹으면 안 돼?’라고 말했는데, 나는 거기다 대고 ‘너야 세상살이 불편한 거 하나 없으니까 그럴 수 있겠지’라고 말했었다. 시간이 지나니까 미안했다.
선화와는 2시간에서 4시간이라는 긴 텀으로 끊길 듯 끊기지 않으며 매일같이 연락을 했다. 주로 동네에서 각자 보물처럼 여기는 장소들을 공유했다. 어디서 어디로 산책하는 길이 예쁘고, 어디에 있는 식당이 의외로 계속 가고 싶다, 같은 것들. 그러다 선화가 자신의 집 근처의 편의점 밖에서 먹는 맥주가 정말 맛있다고 했다. 나는 바로 ‘언제 같이 마시자’라고 말했다. 선화에게선 사상 최고의 텀인 6시간 만에 ‘음… 그래…!ㅋㅋ’라는 어딘가 찜찜한 답장이 왔다. 그 대답에 나는 대화를 다른 주제로 넘기려 했건만, 선화가 되려 나에게 시간이 언제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아무 때나. 그렇게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나는 정말 아무 때나 가능한 사람이었다. 선화와는 금요일에 보기로 했다.
엄마 몰래 바지를 다리미로 다렸다. 은하랑 헤어지고 나서는 한동안 뿌리지 않았던 향수도 오래간만에 뿌리고 밖을 나갔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느껴져 여름이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듣기 좋았다. 매일 가던 편의점을 지나 골목을 꺾었다. 그건 마치 결계를 푸는 것 같았다. 이 골목을 꺾어본 지가 언제였을까. 거기엔 화창한 햇살이, 내가 보지 않겠다고 했던 햇살이 있었다. 천천히 그 빛을 따라 걸었다. 편의점에 다다랐지만 아직 선화와의 약속시간까지는 10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그 근처를 어슬렁어슬렁 거리다 보니 선화가 거의 도착했다는 연락을 보냈다. 나는 다시 편의점 앞에 멀뚱멀뚱 서있었고, 누가 내 어깨를 톡 건드렸다. 뒤를 도니, 선화가 아니라 모르는 여자였다. 모르는 여자는 내게 이렇게 말을 했다.
“오랜만이야”
“선화…?”
선화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화는… 선화가 아니었다. 선화라고? 우리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맥주와 과자를 샀다. 나는 선화를 곁눈질로만 보며 대화를 나눴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마주 앉을 때는 선화를 제대로 쳐다보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런 나를 보고 선화는 다 안다는 듯이 부드럽게 웃었다.
“얼굴이 많이 바뀌었지”
선화는 얼굴 주변을 손으로 조금 훑으며 그렇게 말했다. 선화의 눈동자 위로는 선명한 선이 눈꼬리까지 곡선으로 이어져있었고, 수술인지 시술인진 모르겠다만 갸름한 턱 위로 콧방울 끝이 톡 올라와 있었다. 그 외에도 정확하게 어디가 바뀌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선화는 분명 정말로 많이 달라져있었다.
“어떻게 지냈어?”
“나 그냥 졸업 유예하고… 일자리 알아보고 있지”
“잘 지냈네!”
그 말에 놀라 나는 선화의 얼굴을 처음으로 빤히 쳐다봤다. 정말로? 내가 잘 지냈다고? 나는 그렇게 되물었는데, 선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잖아. 그럼 괜찮은 거 아닌가?’라고 말했다. 순간 그런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넌 어떻게 지냈어?”
“나… 나는 뭐, 나도 뭐… 그냥 그렇지”
선화는 맥주 캔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는데, 예전과 많이 달라진 얼굴을 두고 하기엔 맞지 않는 말이라는 걸 아는 듯했다. 물을까 하다 말하기 싫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별말 하지 않았는데 선화가 한 모금을 마시고선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좀 다 잘 안 풀렸어”
처음에는 연애가 그랬고, 그다음엔 취업이 그랬다고 했다. 듣자 하니 처음 사귄 남자친구가 선화의 외모 지적을 많이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취업… 나도 이해가 됐다. 요즘엔 ‘면접 성형’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어떤 직업을 위해서 선화는 얼굴을 바꾼 걸까? 지금은 일해?
“그냥… 경리 일하고 있어!”
그렇게 말하고 선화는 남은 맥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두 번째 캔은 날씨 탓에 미적지근해져있었고, 확실히 여름이 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름이면… 벌써 한 해의 반이 지나갔음을 뜻했다. 난 지금 뭘 하고 있지?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반년을 보냈다는 사실과 앞으로 남은 반년도 아무것도 계획된 게 없다는 사실에 갑자기 목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맥주를 더 들이부으며 그 기분도 저 어딘가로 넘어가기를 바랐다. 선화는 핸드폰 액정으로, 손거울로 틈만 나면 얼굴을 확인했다. 선화는, 참 예뻤다. 그런데 선화는 행복할까? 오랜만에 마시는 맥주는 너무나 달콤했고, 슬슬 취기가 오르면서 그런 추상적인 것들이 알고 싶어졌다. 결국 선화를 데려다주는 길에 카카오톡 아이디는 먼저 물어보더니 만나기는 싫어하는 것 같았다는 궁금함과 서운함을 술기운을 빌려 말했다.
“모르겠어, 자신감이 생기다가도 내가 부끄러워. 돈 들여서 수술해놓곤 참…”
“행복해야지… 행복해야 돼”
술기운이 오른 나는 난데없이 행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까 거울을 보던 선화가 행복한지 궁금하다는 생각에서 터져 나온 말인 게 분명했다. 그때 선화의 눈이 반짝거렸다. 당시에는 나의 술기운에 이른 착각인 줄 알았는데, 그 직후에 선화가 나에게 잦은 연락을 하는 것으로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이후로 우리는 자주 만났다. 보통 선화가 퇴근하고 오는 시간에 맞춰 동네에서 밥을 먹고 산책을 했다. 선화는 내가 돈이 없는걸 알았는지 주로 많은 금액을 선화가 지불했다. 나는 처음에는 적지만 모아놓은 돈을 아껴 쓰다가, 그마저도 어려워지자 우리 가족이 잔돈이 남을 때마다 넣어 놓는 저금통에서 500원짜리를 몰래 꺼내 가까운 가게에서 지폐로 바꿔 선화를 만나러 갔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나는 일자리를 조금 더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다시 면접을 보기 시작했다. 동네 작은 가게에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부터 중소기업의 단기 계약직까지. 일곱 번째 면접에서 나는 일을 구했다. 작은 회사의 서류 정리 업무였는데, 글자와 숫자만 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일을 구하고 나선 선화와 금요일, 토요일에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관계는 연애는 아니었지만 연애가 아니라고 하기엔 그런 사이가 되어있었고, 암묵적으로 서로 볼 수 있는 시간을 비워놓았다. 그러다 연애관계로 번지게 된 건 선화가 나에게 “너랑 있으면… 뭔가… 든든하달까?”라고 말한 날이었다. 나도 외로워 보이는 선화를, 나보다 거울을 많이 보는 그런 선화를, 챙겨주고 싶었다. 우리는 그동안 서로의 말에 감동했고, 서로에게 느꼈던 애틋함을 고백하며 연애를 시작했다. 월급을 받으면 우리는 조금 비싸고 맛있는 걸 먹으며 기분을 내면서. 그간 세상 사는 게 그렇게도 어렵고 우울했던 내가 다시 밖에도 나가고, 내 몸에 뿌리는 향수의 향기가 방에 남아있으면 엄마는 그렇게도 기뻐하며 나에게 요즘에 너무 좋아 보인다며 밝은 얼굴로 말했다. 행복해하는 엄마를 보며 나는 엄마도, 선화도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고,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아닐까 하는 불확실하고도 우수에 젖은 기대를 했다.
오늘 일기 챌린지가 끝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포인트가 지급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오랜만에 선화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나와 함께했던 사진이 많이 있었고, 선화가 나에게 직접 보냈던 사진들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전보다, 선화의 글이 행복해 보였다. 우리는 우리가 ‘오늘 일기’덕분에 만나게 되었다는 신기한 사실도 곧잘 이야기했었는데 선화의 포스팅을 보다 보니 왠지 만나게 될 운명이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러다 또, 은하가 생각났다. 은하는 이걸 안 할까? 네이버 블로그가 없는 사람도 없고, 은하의 성격을 되돌아보면… 왠지 이런 이벤트를 잘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은하는 자신이 덜렁댄다고 했지만 옆에서 본 바로 은하는 꼼꼼한 사람에 가까웠다. 나는 은하가 좋아하는 카페나 은하네 동네에 있었던 가게들을 검색해보며 은하의 포스팅을 찾으려고 애썼다. 선화에겐 잔다고 거짓말을 하고서 말이다.
나는 머릿속에 은하에 대한 마인드맵을 미친 듯이 그려나갔고, 내가 이렇게도 은하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 많다는 게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 그런 생각이 뻗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은하의 블로그를 찾았다. 모든 포스팅을 누르기가 무서웠다. 그저 은하의 일상이 담겨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왠지 내가 은하에게 줬던 상처나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나쁘게 해석되어 있을까 봐 두려웠다. 나는 최근 몇 개의 포스팅을 두어 개만 보고선 나와 은하가 헤어졌던 시기에 올린 포스팅을 찾았다.
다른 포스팅에 비해 사진이 별로 없었고, 글자가 많았다. 글은 화가 났다가, 슬펐다가, 지쳤다가, 우울해 보였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여행을 가고 싶다, 역시 세상은 혼자 사는 거다, 세상에 사랑은 없다 같은 말들. 그리고 그나마 몇 장 있는 사진들은 은하가 좋아하는 디저트라는 게 와중에 귀여웠다. 포스팅은 점차 밝아졌고, 사진이 많아졌다. 가끔씩 은하와 함께 저녁을 먹었던 은하의 친구들도 볼 수 있었다. 자격증 공부한다더니 결국 합격했구나, 결국 부모님과 함께 사업을 열었구나 하는 최근 소식들은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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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는 나의 업무 처리가 맘에 든다며 정규직을 제안했고, 자소서와 면접을 준비할 필요 없이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을 거절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나에겐 선화가 있었고, 엄마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부터 선화는 나에게 서운해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그런 선화의 마음을 알 수 없었고, 어쩐지 선화와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전보다 비싸고 맛있는 걸 먹으면서 우리의 대화는 전보다 적어졌다. 그리고 선화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다시 거울을 아주 자주 보기 시작했다.
“거울을 왜 그렇게 자주 봐”
선화는 머쓱하게 거울을 집어넣었다. 와중에 선화는 어딘가를 또 시술받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순간 선화에게 어떤 답답함이 느껴졌다. 이유를 물으니 ‘그냥… 뭔가…’라며 모호한 대답을 했다.
“그러면 행복할 것 같아?”
선화는 불현듯 놀란 눈을 하고 그 눈엔 눈물이 고였다. 나는 내가 잘못된 말을 했구나, 하는 걸 선화의 눈을 보고서 깨달았고 그때는 이미 늦었을 때였다. 선화는 나에게 뭐라고 말했는데, 나는 급하게 내 말을 수습하느라 도대체 내가 어떤 말을 내뱉고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나는 그날 집에 돌아가서도 선화에게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선화에겐 답이 없었다. 그날 밤, 꿈에는 은하가 나왔다.
은하와 나는 지하철에 타고 있었다. 은하는 헤드폰을 쓰고 앉아있었고, 나는 은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꿈속에서 내 목소리는 음소거 되어있었다. 은하는 헤드폰을 쓴 채로 맞은편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릴 역이 다가와 은하에게 다급하게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듯이 뱉었고, 은하는 마지막이 되어서 문 앞에 서있는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 눈을 느리게 꿈뻑 했다. 그건 인사처럼 느껴졌지만 인사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내린 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역에서 내린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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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어갔고, 더 이상 편의점 테이블에서 먹기에는 쌀쌀해졌다. 선화는 네일아트를 받았다며 가을에 어울리는 색으로 물들인 손톱을 내게 보여줬다. 뿌리 염색도 했다며 머리 위를 가리켰다. 예쁘네,라고 내가 대답했다.
“근데 암막 커튼 얼마나 해?”
“암막 커튼 달려고?”
잠을 잘 못 잔다고 자주 말했었다. 꿈을 자주 꾸기도 하고, 꿈을 꾸지 않아도 깊이 자지 못한다고. 그러고 보니, 나는 잠을 언제부터 잘 잔 거지? 암막 커튼을 달고도 그렇게 잘 잤던 건 아닌 거 같은데… 생각해 보니, 일을 다니면서부터였다. 그곳에선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었다. 만약 내가 안 나오고 새로운 사람을 뽑아 가르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긴 했다만, 누구도 그렇게 말하진 않았고 모두가 그 과정을 귀찮게 생각했으니, 내가 아무렴 쓸모 있는 사람이었다.
중고거래를 무서워하는 선화를 위해 내가 대신 찾아보고 구매를 도와줬다. 내가 먼저 사면 선화가 돈을 입금해 주겠다고 했는데, 받지는 않으려고 했다. 역 근처 대형마트 앞에서 남자를 만나 커튼을 받고 금액을 건넸다. 집에 도착하니 방금 씻은 선화가 물기를 닦으며 앉아있었다. 걸려있는 커튼 봉을 내리고 커튼을 끼웠다. 그 뒤로 혹시나 도와줄 게 있을까 싶어 목을 위로 쭉 뺀 선화가 있었다. 내려와선 커튼을 한번 쭉 끝까지 쳐봤다. 방은 금세 어두워졌고 탁자나 의자 모서리에만 빛이 조금씩 내려앉았다. 그리고, 서서히 가까워지며 입술을 포갰다. 어두운 방에서 하는 키스는 왠지 더 선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화는 내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나는 도대체 왜 그러냐며 선화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선화는 ‘미안해 내가 못나서 그래’라는 식으로 대화를 회피했다. 선화네 집에 찾아가도 선화는 보이지 않았고, 퇴근 후 원래 가던 골목에도 전혀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던 선화랑 마주친 건 우리가 처음 만난 편의점에서였다. 마주치는 걸 기대했던 게 아니어서 나도 모르게 선화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런데 선화는 나와는 반대로 자연스럽게 눈빛을 보내며 아는 체를 했다. 그게 선화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날 나는 또 한 번 꿈을 꿨다. 저번 꿈과 이어졌다. 내린 지하철역에서 두리번거리던 나는 누군갈 찾고 있었고, 그건 은하인 것 같았는데 은하는 내리지 않은 채 열차 안에서 가만히 있었다. 선화야. 내가 불렀고 선화가 뒤를 돌아봤다. 선화는 무슨 말을 했는데, 나는 선화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입모양은 보이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선화의 말을 추측했다. 그러나 선화는 내가 알아듣지 않아도 괜찮은지 부드럽게 웃으며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을 하고 계단으로 걸어나갔다. 열차가 어두운 통로를 빠져나가고 이내 조용해졌다. 텅 빈 곳에 내가 서있었고, 모두가 나를 떠나갔다.
잠에서 깨어나니 밝은 빛이 방안 전체를 드리우고 있었다. 꿈에 너무 기운을 뺏겨 일어나서 물을 마시려 부엌에 갔다. 보리차를 꺼내 마시는데, 문득 여름날 선화와 함께 먹던 맥주 맛이 생각났다. 더불어 내가 선화와 엄마 그리고 내 주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만 같던 그 마음도. 그 누구도 내가 행복하게 만들진 못했고, 거기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 안에서 또 하나의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모든 게 텅 비어있고 나는 아무것도 채우지 못했다는 것을.'fic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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