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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기, 2019essay 2021. 8. 7. 21:56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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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이라는 한국 영화를 봤다. 이 영화는 내가 너무 많이 좋아해서 그 당시에도 여러 번 반복해서 보고 스무 살이 넘어서도 몇 번을 더 봤다. 거짓 안 보태고 총 열 번은 봤을 거다. 처음에 봤을 당시엔 독립영화를 처음 접한 터라 이런 영화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혔는데, 더 신기한 건 다시 볼 때였다. 처음 봤을 땐 보이지 않던 장면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성인이 되고 나선 고등학생 때 이해되지 않았던 대사가 이해됐다. 그래서 백희만 이해됐던 첫 감상과 다르게 기태도 이해됐고 나중엔 동윤이도 이해가 됐다. 짧지 않은 시간에 걸쳐 거듭해서 보다 보니 이런저런 시선에서 모든 인물과 장면이 이해가 됐다. 거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영화 만큼은 내가 완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 가서도 그렇게 말할 자신이 있었다.
2
내 글들은 대개 과거를 이야기한다. 지나간 유년시절, 학창시절 때의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그래서 나에게 글을 쓰는 과정은 마치 엉망진창인 서랍 속을 똑바로 마주하고 정리하는 과정 같다. 당시엔 날 울렸어도 이제는 웃으면서 읽을 수 있는 편지도 있고,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이제는 씁쓸한 기억이 묻어 바라보기가 어려운 물건도 있는 그런 엉망진창인 서랍. 그런 서랍은 정리하기가 어렵다. 버릴 건지 그대로 둘 건지 정해야 하고 그대로 두면 어디에다 둬야 할지도 정해야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고민도 많이 하게 되고. 이렇듯 지나간 내 감정을 정리해 글을 쓰려 노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시 회상하는 것 자체가 너무 버거울 때도 있고 여전히 부정하고 싶은 일들을 바라봐야 할 때도 있다.
언제는 내가 왜 그 기억들을 쓰고 싶어 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었는데 내 대답은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리고 싶어서였다. 늘 과거에 얽매여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라고 구질구질하게 바라볼 수 있지만 과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건지 나는 모르겠다. 배울 곳도 없었고 알려준 사람도 없었다. 아마 그래서 혼자 글을 쓰게 된 것 같다.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라면 다시 천천히 그 과거를 바라보기로 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 바라본 기억들은 모름지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모든 이유들, 그리고 내가 느낀 감정들을 글로 차례차례 써 내려가며 정리해 본다. 그러면 난 그 과거를 이해하고 인정했다고 선언하는 기분이 든다. 정확한 시선을 가지고 더 옳은 방향으로 마음을 둘 수 있어진다. 그럼 난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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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회담에서 스타일리스트 한혜연이 나와 비혼을 주제로 토론을 했던 회차가 있었다. MC 중에 유일한 유부남인 유세윤에게 나머지 MC들이 결혼의 장점을 말해달라고 했다. 유세윤은 물론 개그맨이지만 이 질문에는 정확하게 대답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유세윤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아이가 있잖아요. 그 아이를 바라보면서 내가 확실히 기억하지 못했고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던 내 과거를 보는 느낌. 내가 그 당시에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던 내 감정들이 이해되면서 삶이 좀 완벽해지는 느낌?’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내 글은 대개 지나간 일들을 이야기한다. 바꿀 수도 없는 과거를 이야기한다. 물론 그 과정이 고통스럽고 성가실 때도 있다. 하지만 처음과는 달리 여러 번 보며 다양한 시점으로 모든 게 이해되는 영화처럼 꼼꼼히 과거를 바라보면, 미성숙했던 내 감정과 그럴 수밖에 없던 타인까지 복합적으로 모든 게 이해가 된다. 물론 이건 내가 자처한 고통이니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살 필요는 없고,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내 글을 읽고 사람들이 잃어버렸던 모습을 다시 되찾았으면 좋겠다는 거다. 이해하지 못했던 과거를 다시 바라보고 이해해보면서 삶이 조금 더 완벽해지는 느낌. 지루하고 새로울 것 없어 보이는 ‘다시 보기’지만 이 방법 말고는 무슨 방법이 있는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니 여태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한동안 난 꽤 오랫동안 다시 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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