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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106일째 비가 내리고 있다. 어떤 날은 부슬비였고, 어떤 날은 폭우였다. 그렇지만 단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내리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지갑, 핸드폰에 이어서 우산을 필수적으로 챙겼다. 더 이상 예전처럼 어딘가에 우산을 놓고 오는 일은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언제나 비가 오고 있으니까. 누구도 우산을 놓고 가지 않았다. 우산의 종류는 다양해졌다. 튼튼한 우산, 아름다운 우산, 노약자가 들 수 있는 가벼운 우산, 방수가 더 잘 되는 우산, 수납이 간편한 우산 등등. 그에 따라 가격대도 다양해졌다.
여름이었지만 덥지 않았다. 그늘을 찾아야 했던 여름은 사라졌다. 모든 곳이 그늘이었으니까. 어쩌다 가끔 낮에만 봄처럼 따뜻했고, 아침저녁으로는 항상 서늘했다. 고로 장갑의 판매율이 좋아졌다. 장시간 우산을 들고 있으려니 시려지는 손끝에는 장갑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산은 아니라 장갑을 자주 잊어버렸다. 가방이나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낼 때나 테이블에서 다른 물건에 밀려 바닥에 떨어지는 일이 잦았다. 장갑은 떨어져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카페나 식당에서 나간 사람에게 뒤따라 오는 사람이 다급하게 무언가를 전해줄 때면 손에 들린 물건이 장갑인 일이 많아졌다.
어딜 가도 눅눅한 냄새가 났다. 이제는 사람들 모두 그 냄새에 익숙해질 정도였다. 맛집의 평가 기준엔 그 눅눅한 냄새가 나는지 나지 않는지도 포함됐다. 식당과 카페들은 청결하고 향기롭게 하는 데에 많은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마트에 들르면 모두 습기 제거제 코너를 필수적으로 들렸고, 홈쇼핑 채널에선 늘 건조기를 판매하고 있었다.
문을 닫는 미용실이 많아졌다. 아무리 머리를 세팅하고 나가도 금세 풀리는 머리에 사람들은 지쳐서 더 이상 머리에 많은 노력을 쏟지 않았다. 악성 곱슬인 사람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다. 애먼 머리에 계속 빗질을 해 머리가 많이 빠지기 시작했다는 글이 각종 커뮤니티에 많이 올라왔다. 탈모에 대한 제품이나 약, 습관들에 대한 정보 또한 많이 올라왔다.
뉴스의 오프닝은 늘 어제의 숫자보다 하나 더 큰 숫자를 붙여 ‘-일째 장마가 계속되고 있습니다’라는 걸로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으며 뉴스를 봤다. 지긋지긋하다고 하는 말도 사라졌다. 가끔 어른들이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라는 말을 하는 정도였다. 사람들은 화창한 날씨를 가지고 있는 해외로 여행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예측 불가능한 기후로 비행기 이륙이 쉽지 않았다. 사고는 아니었지만 롤러코스터 같은 비행으로 비행 공포증이 생겼다는 기사 때문에 사람들은 여행을 가지 않게 됐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기 때문이라면, 기차나 자동차로 여행을 갈 수 있는 거였지만 어딜 가도 비가 오니 굳이 짐을 싸서 어딘가로 이동하는 일은 없었다. 바다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무도 수영복을 사지 않았다. 실내 수영장으로 운동을 갈 수 있었지만 모두가 물에 질려있었다. 물만 보면 답답한 마음이 드는데, 그 물로 뛰어든다는 건 어딘가 싸이코같은 느낌이었다.
한창 폭우의 형태로만 지속됐을 땐 산사태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많은 가정집과 상가들이 피해를 입었고, 인명 피해도 있었다. 보름 동안 80명이 사망했다. ‘우리 애가 저기…’, ‘엄마가 저를 안고 있다가…’, ‘아빠가 잠깐 확인한다고 나갔는데…’라는 식의 말들이 전파를 타고 흘렀다. 개천의 징검다리들은 모두 수면 아래로 잠겨있었다. 사람들은 좁은 우회로로 우산을 부딪히며 돌아가야 했다. 그러다 보면 미끄럼 사고도 많이 일어났다. 빠른 걸음으로 경사진 길을 내려가다 미끄러지거나,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밟고 비틀어진 발걸음에 중심을 잃어 넘어지거나. 뉴스에 나오는 시민들은 늘 울고 있었다.
사랑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한 우산을 같이 쓰고 가면 100퍼센트의 확률로 감정이 있는 관계였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우산을 놓고 왔다’는 귀여운 거짓말을 하곤 했고, 상대방도 마음에 들면 그 거짓말을 모르는 척해 주는 식이었다. 사랑하는 사이인 사람들이 쉽게 눈에 보였다. 그에 따라 바람이나 불륜도 들키기 마련이었다. ’요즘 누가 우산을 안 들고 다녀. 근데 한 우산을 같이 쓰고 있더라니까?’라는 말을 목격자가 하면, 듣는 사람들은 ‘맞아 우산을 왜 같이 써’라고 하며 가정 지어지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 가정은 거의 정확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산을 같이 써서 만나고, 우산을 같이 써서 헤어졌다.
끝날 줄 모르는 장마에 시달리며 사람들은 원인을 찾아내고 싶어 했다.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일회용 잔도 법으로 금지되고 비닐과 빨대 사용도 세계적으로 줄여감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일들이 지속적으로 발생되는지 사람들은 의문이었다. 스트리밍 서비스에는 예전에 만들어진 기후 관련 다큐멘터리들이 다시 업데이트됐고, 사람들은 한 장면 한 장면을 긴장감을 가지고 봤다. 모두들 그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연도를 보고 ‘이때부터 우린 망해가고 있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편리함 속에서 사람들은 많은 걸 잊고 살았다. 모든 걸 편하게 가졌고, 편하게 없앴다. 아이들은 하늘을 회색과 검은색으로 색칠했다. 그 그림들은 커뮤니티에 ‘요즘 애들이 그린 그림. jpg’라는 제목으로 올라왔고 댓글엔 미안하다는 말이 많았다. 이런 세상을 물려줘서 미안하다고. 모두들 2020년을 그리워했다. 장마가 54일로 그쳤던 그 해가 모두의 마음속에 행복으로 새겨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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