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현, 원호, 2020fiction 2021. 8. 6. 15:47
지현, 원호
지현은 애연가였다. 사교를 목적으로 담배를 열심히 학습했던 원호와는 달랐다. 원호와 지현이 처음 만났을 때는 어색할 때마다 담배를 피웠다. 원호는 그때마다 배우길 잘했다고 생각했었다. 지현은 그걸 알았다. 그래서 지현은 ‘담배 피우고 오자’라고 말하지 않고 ‘나 담배 하나만 피고 올게’라고 말했다. 그중 몇 번은 같이 나가자고 했는데, 그럴 때면 ‘자기도 피우게?’라고 물었었다. 원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지현도 느린 속도로 끄덕였다.
왠지 지현은 담배를 피울 때면 지현 그대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부스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 부스 안에는 아무나 들이지 않는 것 같았고, 원호도 거기에 포함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지현이 아무리 가까이에 서있어도 한 발짝도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지현이 불편해할지도 모른다는 마음보다는 지현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까 봐 원호는 긴장됐다. 가끔 찬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을 등지고 서있는 것. 그래서 지현의 담배에 불이 붙게 해주는 것. 원호는 딱 그 정도만 가능한 사람이었다.
원호는 언젠가 지현에게 담배를 끊을 생각이 들지는 않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지현은 없다고 했다. 한두 번 들어본 질문이 아닌 뉘앙스였다. 담배 끊었으면 좋겠어? 아니, 난 자기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지. 지현은 몇 초 동안 빤히 원호를 응시했다.
“거짓말”
원호는 깜짝 놀랐다. 뭐가 거짓말이야. 진짜야. 지현은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원호를 응시했다. 건강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한두 번 들어본 질문 아니라서. 원호는 그때 지현과 드디어 가까워진 느낌을 받았다. 그때부터 원호는 궁금했던 질문들을 조금씩 물어봤다. 그때 그 일은 어떻게 됐어. 그 친구랑 무슨 얘기 했어. 그곳은, 그 영화는, 그 시간은. 지현은 천천히 하나하나 대답했다. 원호는 머릿속으로 퍼즐을 맞추며 지현의 실루엣을 조금 더 선명하게 다듬었다. 하지만 거기서 더 선명해지지 못했다. 지현과는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새해가 오기 전에 이별했다.
새해가 되면 다들 금연을 결심한다는데, 원호는 줄기차게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울 때마다 지현이 생각나서 끊고 싶기도 했지만, 사실 거꾸로였다. 지현을 생각하려고 담배를 피운다는 걸 원호 자신도 알고 있었다. 담배도 지현이 피우던 담배로 바꿨다. 처음엔 역한 맛이었지만 피우다 보니 오히려 다른 담배를 피울 수 없게 됐다. 원호는 담배를 피우는 시간이 좋아졌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오가는 테이블에서 빠져나와 조용하게 담배를 피우는 그 순간이 좋았다. 원호는 지현과의 이별을 떠올렸다. 비로소 지현과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었을 무렵, 원호는 지현에게 소홀히 대했다. 지현의 약속을 쉽게 취소했고, 친구들과 자주 놀았다.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어도 전화를 하지 않고, 잠들었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그날은 원호가 지현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던 날이었다. 지현은 그걸 미리 알았는지, 원호에게 ‘미안하다는 말 안 해도 돼’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만 만나자고 말했다. 원호는 깜짝 놀랐다. 내가 요즘 소홀했어. 미안해. 원호는 다급하게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 그만 듣고 싶어. 들을 때마다 답답해. 지현이 말했다. 실수였을 뿐인데. 날 많이 사랑하지 않았으면서. 어차피 나한테 마음도 열지 않았으면서. 조그만 걸로 핑계 대기는. 헤어진 직후에 원호는 친구들한테 그런 말들로 지현을 험담했었다. 원호는 담배를 하나 더 피웠다. 순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웃어요?”
화장실에 다녀온 동준이 옆에 와 물었다.
"내가 병신 같아서. 전 여자친구가 좀 어려웠거든. 근데 만나다 보니까 편해지더라. 근데, 내가 너무 편하게 대했어. 그래서 사라졌어. 이 연기 보이냐. 이 연기처럼 사라졌어”
원호가 담배 연기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형 술 좀 됐나 보다. 이런 얘기 처음 하는 거 알죠”
“그런가”
“형 담배도 맨날 혼자 피우잖아요.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형 어렵대요. 다가가기 어려운 이미지라고 하던데”
어려운 사람. 지현을 ‘어려운 사람’이라고 표현했었는데, 그 표현이 이젠 자신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원호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방금 동준에게 들은 말 때문인지 사람들이 조금 더 조심히 구는 행동들이 눈에 보였다. 편하게 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원호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아야 하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줘야 하나. 그렇게 고민을 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자리가 끝났다.
원호는 담배를 하나 더 피우고 가겠다며 오는 택시마다 동료들을 태웠다. 동료들이 하나 둘 떠나고 원호 혼자 거리에 남았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얇게 쌓인 눈 위로 동료들의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과 같이 있었나. 지현이도 이런 발자국을 봤겠지. 원호는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어색하게 발을 겹쳤다. 지현과 헤어지고 나서야 지현과 닮아가고 있는 원호였다.
'fic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마, 2020 (0) 2021.08.06 스물두 번째 절기, 2020 (0) 2021.08.06 넌 아직도 네 아빠를 믿니, 2020 (0) 2021.08.06 첫 번째 인사 두 번째 학교, 2020 (0) 2021.08.06 밤 만주와 지구 젤리, 2020 (0) 2021.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