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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 만주와 지구 젤리, 2020
    fiction 2021. 8. 6. 15:43

    만주와 지구 젤리

     

     

    알람이 울렸다. 신혜는 덜 뜬 눈으로 찌개를 데웠다. 노트북을 열고 영화 <시>를 틀었다. 신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시>. 가장 좋아하는 감독 이창동. 신혜는 달리 볼 게 없으면 늘 <시>를 틀어놨다.

     

    “나 멋쟁이로 보여요? 흐흐 멋쟁이 아니에요”

     

    반찬을 꺼내며 신혜가 대사를 따라 했다. 어떤 거에 꽂히면 한동안 그것만 달고 사는 신혜의 성향은 음식에서도 그랬다. 지금은 김치찌개에 꽂혔다. 거기에 진미채볶음과 조미김. 엊그제 계란 프라이를 추가했던 걸 제외하면 일주일 내내 이렇게 아침을 먹고 있다. 밥을 먹으면 바로 설거지를 하고, 샤워를 한다. 전날 생각한 옷을 꺼내 입고, 8시 30분 열차를 탄다.

     

    “신혜 씨는 나이도 어린데 왜 이렇게 스님처럼 살아?”

     

    회식 자리에서 팀장이 자주 하는 말인데, 오늘도 역시 거르지 않았다. 나이 어리면 막 살아야 되나. 신혜는 그 말이 싫었다. 돌아가는 길에 신혜는 어떻게 하면 그 말을 그만하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했다. 다음에도 또 이러면 기분 나쁜 걸 아무래도 티 내야겠어. 신혜는 다짐했다. 집에 도착한 신혜는 샤워를 하며 생각했다. 차분하게 사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 <시>를 틀었다. 커서를 이동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틀었다. 문화 센터에서 선생님이 “시를 쓴 사람은 양미자씨 밖에 없네요”라는 대사부터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이후엔 시가 낭독된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신혜가 따라 말했다. 술기운이 돌았지만 템포도 정확하게 맞췄다.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마지막 구절이 특히 좋았다. 그 장면을 몇 번을 더 돌려보다 잠들었다. 알람이 울렸다. 숙취 때문에 아침은 생략하고 집 앞 편의점에서 포카리 스웨트를 샀다. 

     

    “어제 한잔했구먼?”

     

    아주머니가 새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편의점은 보통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많이 있지만 이 편의점은 가족끼리만 운영됐다. 낮에는 아주머니, 밤에는 아저씨, 주말엔 아들. 신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뚜껑을 열어 꿀꺽꿀꺽 넘겼다. 술을 마시면 늘 아주머니 앞에서 포카리 스웨트를 3분의 1 정도 마시는 퍼포먼스를 한다. 아주머니는 그때마다 웃으시기도 하고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오늘은 다행히 웃으셨다. 신혜는 꾸벅 인사를 했다. 포카리 스웨트 퍼포먼스 때문에 아슬아슬했지만 다행히 8시 30분 열차에 세이브했다. 회사에 도착하니 사람들의 눈이 퀭했다. 또 해장국까지 드셨나 보네. 맞은편 신입 사원인 현영 씨도 눈을 뜨고 감는 게 느렸다. 

     

    “현영 씨도 뚝배기 감자탕 집까지 갔어요?”

     

    “네… 어떻게 아셨어요… 선배님 저 죽을 것 같아요”

     

    회사 앞에 죽여주게 맛있는 감자탕 집이 하필이면 24시였다. 회사 사람들은 매번 어지간히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지나치지 못했다. 신혜는 현영에게 포카리 스웨트를 건넸다. 마셔요. 입 안 대고 마셨어요. 현영은 감사하다고 말한 후 포카리 스웨트를 꿀꺽꿀꺽 넘겼다. 편의점 아주머니한테 내가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신혜는 현영을 보며 웃었다. 현영이 음료수를 내려놓고 말했다.

     

    “근데 제가 끝까지 남아있던 거... 눈치 없는 거예요?”

     

    “왜요?”

     

    “아니... 사실 팀장님이 그냥 하신 말씀일 수도 있는데, 저한테 나이도 어린데... 친구들이랑 약속 없냐고 하셔서요. 원래 2차 이후로는 윗분들끼리 자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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