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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상처 8번째 쿠폰, 2020fiction 2021. 8. 6. 15:41
3번째 상처 8번째 쿠폰
“대일이한테 또 연락왔어”
주리가 소은에게 말했다. 대일은 주리의 전 애인이다. 둘의 헤어짐은 이랬다. 학생인 대일은 돈이 없었고, 주리에게 연애가 부담이 된다고 했다. 대일을 많이 좋아한 주리는 돈 같은 건 신경쓰지 말라고, 내가 일하니까 더 많이 내면 된다고 말했다. 주리는 대일이 자신과의 관계마저 놔버려야 될 만큼 재정적으로 어려운 것 같다고 엉엉 울었지만 소은은 속으로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돈이 궁하면 돈을 벌면 되지 주리를 버리네. 소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소은이 봤을 때 대일은 형편없었다. 그중 가장 최악이었던 건 대일의 음주운전 사건이었다. 대일이 주리와 두 번째 재결합을 한 날, 대일은 주리를 택시 태워 보내곤 음주 단속에 걸렸었다. [씨발 단속 걸렸어 인생 좆같이 안 풀리네] 그때 대일은 주리에게 그렇게 문자를 했다. 소은은 여자친구에게 그렇게 말한다는 게 충격이었지만 주리에게 그건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주리는 그저 ‘어떡해 대일이 단속 걸렸대 어떡해’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걔 그거 엄마 차 아니야?”
“맞아”
“가지가지 하네”
“어떡해. 그럼 집에는 어떻게 갔지? 택시비도 없을 텐데…”
소은은 주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음주운전한 새끼 택시비를 왜 못 줘서 안달인 거야. 정신 차리라고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날까 봐 소은은 가만히 있었다. 주리는 ‘음주운전 형량’을 인터넷에 검색하고 있었다. 주리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서 충전기에 꽂았다. 내일이면 연락이 올 거라고 말했다. 가까스로 주리가 잠에 들었다.
“대일이가 연락이 왜 안되지…”
소은이 눈을 떴을 때 주리는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한 손은 핸드폰을 들고 다른 손은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안색이 너무 안 좋았다. 소은은 아직 안 일어났을 수도 있다고 말하며 라면을 끓였다. 마침 콩나물도 있어 한 움큼 라면에 넣었다. 해장하라고 끓여준 건데 깨작깨작 먹는 주리를 보며 소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에 씌었어 하여튼. 소은은 예전에 만난 기준을 만날 때가 생각났다. 당시 소은은 지금의 주리보다 심각했다. 기준은 화를 잘 못 참았는데, 화가 나면 주변의 물건들을 다 집어던졌다. 언젠간 머그컵을 던져서 깨진 유리조각이 소은의 팔에 스쳤었다. 흉이 질만큼 피가 났는데도 소은은 아무에게도 그 일을 말하지 못했다. 말을 하면, 기준과 헤어지라고 할 테니까. 그 말이 듣고 싶지 않았다. 물건을 요리조리 피해서라도 기준 옆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세 번째 상처가 생겼을 때, 소은은 생각이 들었다. 이건 아니야. 소은은 가까스로 기준에게서 빠져나왔다. 기준은 자신의 존재에 껌뻑 죽는 소은이 떠나니 그제서야 소은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물건을 던지지 않을게. 너를 상처 주지 않을게. 더 소중히 대할게. 주리의 핸드폰은 오후까지도 잠잠했다. 분명 일어났을 시간인 저녁 7시가 다 되어가도 연락이 없었다. 보다 못한 소은이 주리 몰래 대일에게 연락을 했다.
[대일 씨 저 주리 룸메이트 이소은인데요. 주리가 계속 그쪽 연락을 기다리고 있어요. 어제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상황 설명이라도 주리한테 전달 좀 해주세요]
메시지에는 금방 ‘읽음’이라는 표시가 떴다. 그럼에도 두 시간이 다 되도록 답장이 없었다. 시발 뭐 하는 새끼야 이거. 소은은 상황이 명확하게 보였다. 이건 잠수타는 거야. 주리의 얼굴이 다른 날보다 푸석해 보였다. 소은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식탁에 앉은 주리의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핸드폰 액정을 요리조리 보고 있었다.
“연락 왔어?”
주리는 말없이 핸드폰을 보여줬다.
[경제적으로 도움받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지. 면허 취소됐어. 경찰이 집까지 데려다주고 존나 편하더라. 그래도 누나 보니까 좋았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평생 나 저주하면서 살아]
“씨발 이 새끼 병신 새끼 아니냐?”
주리가 말했다. 소은은 마음 속으로 박수를 쳤다. 기준에게서 세 번째 상처가 났던 날, 모든 마음이 정리가 되던 게 생각났다. 주리도 드디어 벗어나는구나. 그런데 대일에게 또 연락이 왔다니. 소은은 순간 물을 뿜을 뻔 했다.
“뭐라고?”
“보고 싶대”
“그래서 넌 뭐라고 했어”
“잡귀야 물러가라라고 보냈어”
소은은 크게 웃었다. 주리가 정말 정신을 차렸구나. 소은은 화면을 보여달라고 했다. 정말로 주리가 ‘잡귀야 물러가라’라고 일곱 글자를 보냈다. 소은은 다시 한번 더 웃었다. 소은과 주리는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응시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오랜만에 치킨을 시켜 먹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둘 중 한 명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치킨을 먹었다. 그래서 치킨을 먹으면 묘하게 복잡한 감정이 서리기도 했지만 치킨이 너무 맛있어서 금방 잊게 됐다.
“대일이랑 헤어질 때, 네가 기준 씨랑 만났던 거 생각나더라”
“나도 너 보면서 그때 생각나더라”
소은은 자신의 오른팔에 있는 흉터를 만졌다. 기준과의 연애를 표상하는 흉터. 소은은 그 흉터를 보며 다시는 그런 연애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주리가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냈다. 치킨이 오기 전에 맥주부터 먼저 마셨다. 어제도 먹은 맥주인데 오늘은 더 시원하고 맛있었다. 소은은 주리에게 고생했다고 말했다. 주리는 웃으면서 ‘그치 내가 한 거 연애 아니라 고생이지’라고 재치 있게 받아쳤다. 소은은 주리의 초점이 정확해진 게 느껴졌다. 앞으로도 계속 저 초점이 유지되길 바랐다. 초인종이 울렸다. 주리가 현관을 향했다. 주리의 걸음이 가볍다. 따뜻한 치킨과 시원한 맥주가 소은과 주리를 행복하게 해줬다. 이별도 꽤 괜찮은 것 같아. 맞아 그런 것 같아. 소은과 주리가 환하게 웃었다. 어느덧 쿠폰이 8개였다. 두 번만 더 힘든 일이 생기면 치킨 한 마리를 공짜로 먹을 수 있었다. 소은은 사이좋게 하나씩 겪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음엔 무슨 일이 생길까. 이별? 사기? 해고? 소은은 여러 가지 불행을 생각했다. 그 속엔 약간의 설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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