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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조림 파인애플, 2019essay 2021. 8. 7. 21:29
통조림 파인애플;
내가 사랑했지만 잃어버린 것들과 곳곳에서 발견되는 영원에 대한 소망
1
얼마 전에 을지로 만선 호프에서 우산을 잃어버렸다. 파란색 장우산. 몇 년 동안 썼던 우산이었는데 날씨 때문에 자리를 여러 번 옮기다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주 순식간에 잃어버렸다. 우산을 잃어버리는 게 무슨 대수일까 싶지만, 그 잃어버리는 일이 지겨웠다. 더 이상 내 인생에서 그런 일이 없었으면 했다. 그래서 일부러 눈에 쉽게 띌만한 파란색, 크기가 큰 장우산으로 샀던 거였는데, 잃어버렸다. 비가 조금만 오는 날엔 갖고 다니기가 걸리적거리는 크기였지만, 그래도 열심히 들고 다녔었는데, 이렇게 쉽게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그 순간에 우산의 색깔과 크기 같은 건 아무 소용도 없었다.
2
아마 내 또래 모두가 그렇겠지만, 나는 싸이월드를 했었다. 싸이월드는 미니홈피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자신의 미니홈피를 예쁘게 꾸미는 것이 관건이었다. 나는 그게 재밌었다. 그래서 문화상품권을 사서 도토리를 충전했다. 그 도토리들로 미니홈피를 꾸몄다. 예쁜 스킨, 예쁜 폰트. 그리고 하이라이트인 BGM(background music). 스킨과 폰트는 적당히 고민 없이 골랐던 것 같은데, 노래가 문제였다. 왠지 스킨과 폰트는 어차피 고를 수 있는 것들 안에서 최선을 고르는 느낌이었다면 노래는 유난히 고민이었다. 뭔가 끝내주는 걸 하고 싶었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을 영원한 노래를 찾고 싶었다. 그 땐 5천 원도 큰돈이었기 때문에 내 도토리가 제값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진장 열심히 골랐다. 며칠을 들어보고 도입부 부터 엔딩까지 거슬리는 게 없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마 그렇게 골랐던 노래가 바이브-사진을 보다가 였던 것 같은데... 웃기게도 이 노래는 더 이상 듣지 않는다. (물론 그때 도토리로 산 노래 중에 여전히 가끔씩 듣는 것도 있다. Suzanne vega - tom’s diner. 다른 사람 미니홈피에 가서 우연히 듣게 된 노래였는데 너무 좋아서 나도 구매했었다) 아무튼 이렇게 단순하고 실없이 나에게서 ‘영원할 노래’를 찾는 경험을 해보았다. 물론 실패했지만.
그런데 싸이월드에서만 이런 감정을 느꼈던 건 아니다. 인스타그램에서도 느꼈다. 인스타그램에는 ‘스토리’라는 기능이 있는데, 스토리에 올린 게시물은 오직 24시간만 유효하다. 그래서 나는 사진들을 피드(feed)에 박제시킬만한 사진인지 24시간만 유효한 스토리에 올릴만한 사진인지 판단하게 되었다. 스토리 게시물은 무의미하고 피드 게시물은 유의미하다는 단순한 소리를 하자는 게 아니고, 스토리나 피드 중 어느 쪽으로 올릴지를 정하는 그 순간을 말하는 거다. 어떤 기준에 의해 마음이 한 쪽으로 기우는 그 찰나의 순간. 아마 다들 겪어봤을 거라고 생각한다.
3
어제는 내 책 2차 인쇄분이 모두 소진되어 인쇄소에 3차 인쇄를 하러 방문했다. 사장님은 “오랜만에 오셨네요.”라는 인사를 해주셨다. 일을 마치고 인쇄소를 나오면서는 기분이 이상했다. 어딘가 불안했다. 그래서 인쇄소에서 바로 집으로 가기가 감정적으로 지쳐 전에 한 번 갔던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시키곤 한동안 벽에 기대어 허공만 바라봤다. 나는 문득 이 아름다운 시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고 훗날 술자리에서 “너 예전에 20대 때 글 쓰는 거 좋아해서 책도 만들고 그랬었는데~”라는 말이 아픔 없이 안주로 오가는 상상을 했다. 끔찍했다.
생각은 자연스레 책을 만들던 작년 겨울을 떠올렸다. 제작 초반에 나는 내가 생각한 이미지들을 그저 구현해내고 일을 진행하는 데 정신이 집중되어있었다. 그런데 제작 말미에 가서는 많이 불안했다. 생각이 많아졌다. ‘이게 만들어지는 건가? ‘부터 시작해서 만들어지면 ‘그다음엔?’, ‘어차피 잠깐 기억됐다가 사라지겠지?’, ‘그러면 사라진 후에는?’, ‘그 후에 내 마음은?’
언젠가부터 무언가가 생기면 늘 사라질 걱정부터 했다. 물론 이 걱정은 나의 기질 특성상 아픔이나 슬픔보단 행복이나 기쁨에 적용됐다. 세상 모든 게 그렇듯 내 글도 언젠간 잊힌다. 내 글을 사랑해주는 마음들도 없어지는 날이 올 거다. 내가 내 글을 사랑하는 마음도 변할 수도 있는 거니까. 내 마음이랄 게 특별할 게 하나도 없고 정말이지 모든 게 다를 게 없다.
내 왼팔엔 ‘영원’이라는 단어가 한문으로 조그맣게 새겨져있다. 사람들에게 이걸 알려주면 가끔 비웃을 때가 있는데, 그러면 나는 영원한 게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어서 이거라도 영원했으면 좋겠기에 한 거라고 받아친다. 그런데 오늘은 나조차도 내 왼팔에 있는 ‘영원’타투가 철없어 보인다. 그 어떤 나쁜 일도 없었지만 왠지 오늘만큼은 그래 보인다.
4
영화 <중경삼림>에서 금성무의 대사 중엔 이런 대사가 있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어느 물건이든 기한이 있다. 난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에 유효 기한이 없는 것은 없는 걸까?” 그리곤 헤어진 애인이 좋아했던 통조림 파인애플을 산다. 마트에서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까지의 유효 기간을 가진 통조림 파인애플을 몽땅 사버린 뒤 정확히 5월 1일에 모두 다 먹어치워버린다. 글을 마치니 그 장면이 떠올라 ‘통조림 파인애플’이라고 제목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그 통조림 파인애플을 몽땅 먹어치워버린 후에도 영화에선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금성무 에피소드는 그렇게 끝이 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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