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wasreality_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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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기, 2021fiction 2021. 8. 6. 16:11
오늘 일기 * 다음 글을 클릭했다. 벌써 열두 번째 포스팅이었다. 세 번째 포스팅에선 ‘선화 님을 이웃추가하고 새 글을 받아보세요’라는 알림 창이 떴고 나는 혹시나 잘못 누를까 눈을 똑바로 뜨고 정확히 ‘취소’라는 글자의 중앙을 눌렀다. 네이버에서는 일상 포스팅을 하는 유저들을 독려하기 위해 매일 일기를 쓰면 현금처럼 쓸 수 있는 포인트를 지급해 주는 이벤트를 했다. 일상 포스팅을 쭉 써오던 사람들보다 나같이 돈이 목적인 사람들이 훨씬 많이 참여한 것 같긴 했지만, 아무튼. 나머지 포스팅은 내일 보기로 하고 우선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날 꿈엔 은하가 나왔다. 은하는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어깨 정도에서 삐죽삐죽 바깥으로 뻗은 머리를 하고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은하에게 다가가 어디로 가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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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크레딧, 2021fiction 2021. 8. 6. 15:54
엔딩 크레딧 종환은 선우를 소개로 만났다. ‘내 주변에 너처럼 영화 진짜 좋아하는 애가 하나 있는데••• 만나볼래?’가 선우에 대한 말이었다. 선우는 영화에 대해 꽤 많이 알았다. 영화를 말하면 감독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 감독의 예전 스타일이 어땠는지, 어떤 기법을 사용했는지, 그 감독의 유년기는 어땠는지까지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종환은 선우와 연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도록 그런 연애를 꿈꿔왔기 때문에. 카페에 앉아서, 길을 걸으면서, 술을 마시면서, 알몸으로 나란히 누워 천장을 보면서 영화 얘기를 하는 연애. 설명하지 않아도 착착 알아듣는 애인. 둘의 사이는 빠른 속도로 깊어져갔다. 종환은 선우와 함께 영화제에 갔다. 거기엔 영화관이 모여있었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관계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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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주세요, 2021fiction 2021. 8. 6. 15:53
더 주세요 * 소시지 두 개, 양파와 피망 세네 조각이 은하의 반찬 칸에 담겼다. 은하가 고개를 들어 흰색 옷을 입은 중년의 여자를 쳐다봤다. “헐 이것밖에 안 줘요?” “아니 이게… 양이…” “좀만 더 주세요” 중년 여자가 곤란하다는 듯 오른쪽 끝에 서있는 젊은 여자를 흘끗 본 후, 소시지 두 개를 더 담았다. 뒤이어 영지였다. 영지에게도 소시지 두 개, 양파와 피망 세네 조각이 담겼다. 중년 여자가 슬쩍 영지의 눈치를 봤다. 영지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듯 숙여 짧게 인사한 후, 몸을 왼쪽으로 옮겼다. 은하의 뒤를 따라 걸었다. 빈자리에 앉았다. “진짜 조금 준다. 오늘 먹을 거 이거밖에 없으면서 소시지 두 개가 뭐냐. 어 뭐야, 너 더 달라고 안 했어?” “응 그냥 어차피 오늘 맛없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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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2020fiction 2021. 8. 6. 15:49
장마 106일째 비가 내리고 있다. 어떤 날은 부슬비였고, 어떤 날은 폭우였다. 그렇지만 단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내리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지갑, 핸드폰에 이어서 우산을 필수적으로 챙겼다. 더 이상 예전처럼 어딘가에 우산을 놓고 오는 일은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언제나 비가 오고 있으니까. 누구도 우산을 놓고 가지 않았다. 우산의 종류는 다양해졌다. 튼튼한 우산, 아름다운 우산, 노약자가 들 수 있는 가벼운 우산, 방수가 더 잘 되는 우산, 수납이 간편한 우산 등등. 그에 따라 가격대도 다양해졌다. 여름이었지만 덥지 않았다. 그늘을 찾아야 했던 여름은 사라졌다. 모든 곳이 그늘이었으니까. 어쩌다 가끔 낮에만 봄처럼 따뜻했고, 아침저녁으로는 항상 서늘했다. 고로 장갑의 판매율이 좋아졌다. 장시간 우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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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번째 절기, 2020fiction 2021. 8. 6. 15:48
스물두 번째 절기 “달력이 따로 없네” 영원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내리며 혼잣말로 말했다. 사람들은 여름이 끝나갈 때면 여름 내 놀러 갔던 바다, 먹었던 음식, 여름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 등을 묶어 ‘여름아 잘 가’라는 뉘앙스의 캡션과 함께 올렸다. 몇몇은 다가올 가을을 반기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보통 이러면 사진은 작년 가을 사진이었다. 기상예보에서 오늘이 동지(冬至) 임을 알렸다. 일 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긴 날. 실시간 검색어에는 ‘팥죽 만드는 법’이 3위에 올라와 있었다. 내일은 인스타그램에서 팥죽을 보겠구나. 영원이 생각했다. 지나간 시간. 영원은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다 지나간 남자들을 떠올렸다. A랑은 손을 잡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고, H와는 술에 취해 하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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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 원호, 2020fiction 2021. 8. 6. 15:47
지현, 원호 지현은 애연가였다. 사교를 목적으로 담배를 열심히 학습했던 원호와는 달랐다. 원호와 지현이 처음 만났을 때는 어색할 때마다 담배를 피웠다. 원호는 그때마다 배우길 잘했다고 생각했었다. 지현은 그걸 알았다. 그래서 지현은 ‘담배 피우고 오자’라고 말하지 않고 ‘나 담배 하나만 피고 올게’라고 말했다. 그중 몇 번은 같이 나가자고 했는데, 그럴 때면 ‘자기도 피우게?’라고 물었었다. 원호는 고개를 끄덕였고, 지현도 느린 속도로 끄덕였다. 왠지 지현은 담배를 피울 때면 지현 그대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부스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 부스 안에는 아무나 들이지 않는 것 같았고, 원호도 거기에 포함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지현이 아무리 가까이에 서있어도 한 발짝도 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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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아직도 네 아빠를 믿니, 2020fiction 2021. 8. 6. 15:46
넌 아직도 네 아빠를 믿니 그게 내가 엄마한테 제일 자주 들은 말이었어. 그래서 난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한다는 것도 믿지 못했어. 엄마가 뭘 잘못해서 아빠랑 같이 사는 줄 알았지. 근데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라는 거야. 그 얘기를 처음 들을 때 속으로 생각했어. 어? 아닌데? 우리 엄마 아빠 서로 안 사랑하는데? 참 이상하지. 근데 결혼식은 또 했더라. 둘이 입 맞추는 사진도 있어. 진짜 남들처럼 드레스 입고, 턱시도 입고. 젊었더라. 아니 어렸다고 해야 맞겠다. 물어봤어. 엄마는 아빠 좋아해? 빨래를 탁탁 개면서 그러더라. 좋아하긴 개뿔. 철없을 때 뭣도 모르고 시집온 거지. 그러면 그때는 좋았냐고 물으니까 기억 안 난대. 근데도 밥은 꼬박꼬박 다 챙겨주더라. 근데도 그 말을 늘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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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만주와 지구 젤리, 2020fiction 2021. 8. 6. 15:43
밤 만주와 지구 젤리 알람이 울렸다. 신혜는 덜 뜬 눈으로 찌개를 데웠다. 노트북을 열고 영화 를 틀었다. 신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 가장 좋아하는 감독 이창동. 신혜는 달리 볼 게 없으면 늘 를 틀어놨다. “나 멋쟁이로 보여요? 흐흐 멋쟁이 아니에요” 반찬을 꺼내며 신혜가 대사를 따라 했다. 어떤 거에 꽂히면 한동안 그것만 달고 사는 신혜의 성향은 음식에서도 그랬다. 지금은 김치찌개에 꽂혔다. 거기에 진미채볶음과 조미김. 엊그제 계란 프라이를 추가했던 걸 제외하면 일주일 내내 이렇게 아침을 먹고 있다. 밥을 먹으면 바로 설거지를 하고, 샤워를 한다. 전날 생각한 옷을 꺼내 입고, 8시 30분 열차를 탄다. “신혜 씨는 나이도 어린데 왜 이렇게 스님처럼 살아?” 회식 자리에서 팀장이 자주 하는 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