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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희와 앵무새, 2018fiction 2021. 7. 22. 16:44
영희와 앵무새
영희는 늘 아빠를 의심했다. 영희는 늘 아빠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따금 영희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도와주기는 했지만, 그 도움도 의심스러웠다. 어딘가 불편했다. 그때마다 아빠의 표정은 늘 어딘가 짜증나보였으니까. 세상은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영희는 그 말을 되새겼다. 맞아,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니까. 그렇다고 하니까. 내가 했던 생각은 다 의심인 거야.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시간이 계속 흐르고 영희는 고등학생이 됐다. 영희에게는 집안 얘기를 할 만큼 친한 친구들도 생겼다. 친구들과 영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폭언,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가진 친구, 엄마를 때리는 아버지를 가진 친구, 도박을 해 가끔에나 집에 오는 아버지를 가진 친구, 아버지의 근황을 모르는 친구 등등. 영희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어쩌면 영희의 아빠가 꽤 괜찮은 아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대화할 수 있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문을 닫지는 않았다. 아빠를 계속 의심했지만, 그건 사실 믿고 싶은 마음이었다.
영희는 헷갈렸다. 전과같이 중요하게 큰돈을 지불할 일이 있으면 여전히 아빠는 탐탁지 않게 지불해줬고, 찝찝하지만 문제는 해결이 됐으니까. 어쩌다 영희는 아빠는 나보다 돈이 더 중요한 사람일까? 하는 생각도 일말에 들었다. 그리고 아빠의 실언들과 함께 틀린 행동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TV를 보시면서 흘리듯 하시는 말씀들,영희와 엄마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역겨운 행동들. 아빠가 별로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빠는 영희에게 자신은 가족을 위해서 산다고 말한다. 하지만 영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면서. 영희는 아빠가 아빠 자신을 위해 그런 삶을 지속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오후였다. 영희는 밥을 알아서 차려 먹고 설거지를 하려고 싱크대에 서니 아빠의 설거지가 있었다. 영희는 영희의 설거지와 놓여있던 아빠의 설거지를 같이 설거지했다. 아빠는 그런 영희의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다음 날 오후에도 싱크대엔 아빠의 설거지가 있었고, 영희는 전날과 같이 설거지를 했다. 아빠는 매우 흡족해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이었다. 영희는 눈도 뜨지 못한 채로 밥을 차려 먹으러 거실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빠는 영희를 붙잡았다. 그러곤 말했다. “설거지 좀 해주면 안 돼?” 영희는 무슨 소리세요. 라고 대답했다. 영희는 기분이 안 좋아졌다. 아빠가 괘씸했다. 이틀 동안 설거지를 했던 자신의 행동을 아빠는 이렇게 받아들였다니. 엄마는 영희가 일어나면 “밥 먹어야지?”라는 말과 함께 식사를 챙겨주시는 마음이 우선이었는데, 아빠는 나를 보고 설거지부터 생각한다니. 비참했다.
영희는 그 다음날도, 그 다다음날도, 그 다다음날의 다음날도 절대로 아빠의 설거지를 하지 않았다. 영희는 영희의 그릇만 설거지했다. 이윽고 아빠는 영희의 그런 행동에 화가 났다. 아빠는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설거지는 네가 해야지. 영희는 대답했다. 아빠가 드신 거잖아요. 아빠는 영희의 뒷말을 잘라먹고 소리 질렀다. 니꺼 내꺼 따지면서 그딴 식으로 행동하는 게 아니야. 너는 밖에 나가서도 그런식으로 행동하니? 밖에서는 안이래요. 그리고 니꺼 내꺼 없는 일이면 아빠가 하셔도 되는 거잖아요. 내가 너 부모인 걸 떠나서 사회생활 선배로서 하는 말이야. 너는 밖에서는 안 그러면 집에서는 왜 그러는데. 왜 그러는데!!! 아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영희는 눈물이 났다. 영희는 그 순간 확인을 했다. 맞아, 아빠는 이런 사람이었지. 아빠는, 설거지가 정말 하기 싫으시구나. 아빠는,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게 남한테 상처를 주는 것보다 못 참을 일이구나. 아빠는, 나를 안 사랑하시는구나. 영희는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는 설거지를 잘하겠다고 말한 뒤 집을 뛰쳐나갔다.
다음날이었다. 외출하고 돌아온 아빠는 영희의 기분을 살피려 영희에게 밥을 먹었는지 물었고, 영희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답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다시 한번 밥 먹었냐고. 라고 물었지만 영희는 묵묵부답이었다. 영희는 침대에 누워서 울기만 했다. 영희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먹으면 설거지가 나올 테니까. 설거지를 하면 하는 대로 비참할 것이고,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일 테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엄마가 왔고 영희는 밥을 먹었다고 거짓말했다. 하루하루 흐를수록 희석이 되어야 할 감정은 나날이 고립되기만 했다. 몇십 년 동안 의심했지만 믿고 싶었던 아빠의 사랑을 이딴 설거지 다툼으로 확인받는다니. 화난 얼굴을 하고 영희를 향해 고래고래 지르던 목소리. 그 장면이 영희는 계속해서 생각났다.
아빠는 영희가 자신에게 마음의 문을 닫은 게 그 날 설거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영희는 늘 아빠의 사랑이 불안했다. 그리고 설거지 사건은 영희가 수 없이 의심했던 날들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이었다. 영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빠도 나를 안 사랑하는데 누가 나를 사랑해줄까. 인정하기 싫었지만 내 존재가 무가치하고 의미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마주했다. 영희는 비참하고 창피했다. 아빠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사실을 어디에도 말할 수 없었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신을 믿는다면 신에게라도 말할 수 있었을까 상상했지만 영희는 신에게도 말을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대상이 누구든 간에 이 사실을 고백한다면 영희는 정말 인정해야 하니까. 외면하고 싶었다.
영희는 아빠와 다시 인사를 하고 안부를 나눈다. 예의는 존재하지만 사랑은 없다. 가족들은 영희에게 더 묻지 않는다. 가족을 바라보면 답답하다. 영희는 더 이상 아빠가 혐오스럽지 않다. 영희는 그저 공허함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영희는 아빠가 앵무새를 키우고 싶다고 한 그 말을 계속 생각한다. 언젠가 아빠는 앵무새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하는 말을 앵무새가 따라 말할 것 아니냐고, 아이처럼 상상하던 아빠의 얼굴이 생각난다. 아빠 본인은 알았을까, 자신이 지금 얼마나 쓸쓸한 고백을 하고 있는지를. 영희는 잘 살다가도 가끔 그 말이 생각난다. 앵무새를 키우고 싶다고 했던, 아빠의 말이.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그래도 나를 조금은 사랑하시겠지. 내가 다 알지는 못하는 거니까. 라고 대충 생각하기로 했다. 결핍에서 오는 감정이 곧 관계에서 발악적으로 번질 때가 많았고, 그 발악은 영희를 지치게 만들고 때때론 비참하게도 만들어버려 영희는 자신이 틀려먹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를 탓하거나 내가 고장 난 원인으로 부모를 지목하면 안 된다고 세상은 말하니까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영희는 언제 죽을까. 언제쯤 죽을 수 있을까. 아니면 언젠가라도 말할 수 있을까. 내 결핍을 세상에 고백할 수 있을까. 이 마음을 후회할 날이 올까. 후회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희는 오늘도 잠을 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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