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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방인, 2019essay 2021. 8. 7. 21:18
영원한 이방인
열여덟-열아홉 때였던 것 같은데 홍대에 아늑한 카페가 있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카페였고 반지하에 위치해있었다. 어떤 특별함 같은 게 있진 않았지만 편안했다. 사람들이 적당히 오고 갔고, 음료의 맛도 불편한 구석이 없었다. 은근한 편안함에 나는 내 지인들과 홍대에 가게 되면 자주 그곳에 갔고 사장님은 어느덧 나를 기억하셨다. 기억하시니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음료를 시키면 케이크를 서비스로 주셨다. 몇 번 감사히 먹었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그랬다. 그래서 그다음에 갔을 땐 애초에 케이크도 시켜버렸다. 하지만 내 계획은 소용없었다. 사장님은 결제할 때 금액을 깎아주셨다. 너무 감사했지만 이상하게도 난 더 이상 그 카페에 가기가 어려워졌다. 나는 다른 카페를 찾기로 했다.
딱히 계속 머물 카페는 찾지 못해 이곳저곳을 다녔다. 하지만 나의 생김새가 기억하기 쉬운지 여러 사장님들께선 내가 한두 번만 가도 나를 기억하시곤 했다. 그래서 새롭게 가게 된 곳에서도 그런 일들이 또다시 일어났다. 그러면 난 또 떠났고, 또 떠났다. 그리고 새롭게 가는 가게가 제발 적당히 친절하길 바랐고, 적당한 친절을 베풀어주는 곳은 나에게 종종 좋은 장소가 돼곤했다.
짐 자무시 감독의 데뷔작인 <영원한 휴가>에서 주인공 알리는 이방인의 삶을 산다. 언제나 낯선 곳에 가서 낯선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자신을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설명하며 찰리 파커처럼 하얀색 쓰리 피스 정장을 입고 젊을 때 죽고 싶다고 한다. 누구나 다 혼자라고 이야기하며 말이다. 근데 그런 영화를 만든 짐 자무시가 최근작 <패터슨>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패터슨>에서 패터슨은 정착한 삶을 산다. 일어나서 시리얼을 먹고, 버스 운전을 시작하기 전에 시를 쓰고, 운전이 끝나면 집에 돌아와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 자주 가는 펍에서 술을 한 잔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 철부지 아내와 적당한 대화를 하고 잠에 든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모든 에피소드들은 그저 에피소드로 그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우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패터슨의 조용한 일주일을 경험한다.
이방인이고 싶어 하는 알리에서 정착한 패터슨까지. 실제로 짐 자무시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짐 자무시가 가진 삶의 태도가 변화한 게 아닐까 짐작했다.
그와 같은 마음 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언제나 내가 이방인이려고 했다. 의지와 확인이 필요하지 않은 인물로써 존재하는 것이 가볍고 좋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과정을 다 거친 뒤 묵묵히 머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앞의 내 얘기로 돌아가 해석해보자면 자주 가는 카페에서 베풀어주는 마음을 마냥 어려워하고 불편해하는 나보단 상대방의 마음을 잘 받고 나도 나의 마음을 나의 방식으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는 거다. 내가 떠나는 게 내 딴엔 배려지만 사실 그게 상대방의 마음을 기만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는 것에만 익숙했고 받는 것에는 서툴렀다. 그래서 내 딴에 순수한 배려라고 생각하고 한 행동들이 사실은 내가 어떤 존재로써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몰라 저지른 행동에 불과했고 그런 나의 어설픔은 몇몇 관계를 아무 설명 없이 그르쳐 버렸다.
어떤 일이 날 변하게 한 건지 아니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변하게 된 건지는 몰라도, 이제는 전과 다르게 좋은 곳을 알게 되면 그곳만 갈 수 있게 됐다. 몇몇 가게는 사장님들이랑도 꽤 친해져 사소한 선물도 주고받으며 이따금 안부도 묻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렇게 마음먹기 전에 홍대의 그 아늑한 카페는 없어져 버렸고, 그 카페를 운영하는 마지막 날에 파티를 할 테니 오라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난 가지 못했다. 그래서 난 지금 사장님이 어떻게 지내시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만일 그때에 좀 덜 서툴러서 사장님의 마음을 잘 받아냈고 그 파티에 작은 선물을 들고 방문했다면 그 사장님의 안부도 어쩌면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영원한 휴가>에서 알리는 마지막까지 자신은 평생 정착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지만 난 그렇게 말한 알리도 어쩌면 정착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영화에서는 노래 ‘Somewhere over the rainbow’가 흘러나온다. 어딘가에 있을 무지개가 어쩌면, 알리가 계속해서 떠나버려서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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