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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Still Life), 2019essay 2021. 8. 4. 11:22
스틸 라이프 (Stil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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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만들어서 판매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어쩌면 맥빠지는 소리일 수도 있지만 나는 내가 글을 쓰게 될 줄 몰랐다. 고로 책을 내게 될 줄도 몰랐다. 물론 글을 쓰기 시작한 후부터는 언젠간 책을 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인생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알지 못했다. 난 대학에 사진으로 입학했는데 수업은 현대예술이론 및 실기를 배워 졸업했고 졸업 후엔 옷가게에서 일을 하면서 글을 써서 책을 냈다. 난 정말 내가 이렇게 살아갈 줄 몰랐다. 아무튼 다시 글을 쓰게 될 줄 몰랐던 얘기로 돌아가서, 내가 글을 쓰게 된 상황적 계기는 노트북을 사게되면서였다. 난 게임도 안하고 일러스트나 영상이나 음악 작업도 하지 않으니 노트북을 열면 PC 메신저와 포토부스 밖에 켜는게 없었다. 내가 이러려고 노트북을 백 몇만원 주고 산 걸까 싶은 생각이 드니 내 자신에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뭐 좀 생산적인 것 없을까…’하는 생각으로 시작된 게 내 글쓰기다. 처음엔 남들 다 작업용으로 사는 맥북으로 텍스트를 쓰기 위해 타자만 치는 내가 또 웃기기도 했지만 아무튼 머리 맡에 두고 글이 생각이 나면 언제고 열어서 쓸 수 있는 편리함이 글 쓰는 걸 가능하도록 해줬다. 그래서 하나 둘 올리다보니 주변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왔고, 갯수가 많아지니 양적으로 책으로 엮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작년엔 해가 다 지나기 전에 뭔가를 만들어내면 기분이 너무 좋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마음으로 만들게 된 게 <it was reality>책이다. 물론 책을 내면서 인생이 책을 내기 전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많은 것들이 여전히 제자리다. 난 여전히 옷가게에서 일하고 근무 중 식사시간에 편의점 삼각김밥에 딸기우유를 먹으면서 내 책의 재입고 소식을 확인한다. ‘작가님 응원해요’라는 메세지도 받는다. 내 앞에 널브러진 삼각김밥 포장지와 빈 우유곽을 보고있자니 모양이 영 웃겨서 웃은 적도 있다. 속으로 ‘이것도 내 책 제목처럼 리얼리티네.’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곤 쉬는시간이 끝나가 양치하고 다시 일하러 갔다.
2
언젠가 명절에 특선영화로 TV에서 이창동 감독의 ‘시’를 방영했었다. 엄마랑 같이 보았다. 수다를 떨고 할 일을 하면서 봤기 때문에 장면 장면 집중해서 보지 못하고 엄마도 나도 그냥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며 보고있었다. (‘시’를 안 보셨는데 보실 예정이 있으신 분들은 이 단락은 넘어가도 좋다. 잠깐 영화 속 얘기를 할 거다) 영화에선 윤정희 할머니가 간병을 하는 몸이 불편한 회장님이 나온다. 회장님이 윤정희 할머니께 약을 달라고 하는 장면이 있었다. 윤정희 할머니는 미소와 함께 “무슨 약인데요~? 오호호호”라고 물었지만 회장님은 설명 없이 그냥 달라고 했다. 나는 아픈 사람이 약을 먹는 것이니까 아무 생각 없이 보았는데 엄마는 빨래를 탁탁 개며 TV는 쳐다보지도 않고 “비아그라네” 라고 하는 것이다. 난 “설마”라고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다음 장면에선 회장님이 윤정희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제발 남자구실을 하고 싶다고 부탁한다고 애걸복걸을 하는 것이다. 영화도 충격이었지만 그걸 당연한 흐름으로 알고 있는 엄마가 더 충격이었다. 엄마는 어떻게 아시는 거지.
하지만 엄마라고 뭐 공부를 해서 알았을까. 그냥 살다보니까 인간이 그런 것이라는 걸 겪으면서 아셨을꺼다. 시간이 흐를 수록 아는 건 너무 많아지고 그 벌로 점점 무감(無感)해진다. 뻣뻣하고 건조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 갠 빨래를 서랍에 넣었고 다시 소파에 앉아 ‘시’를 끝까지 보았고 좋은 영화인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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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인생이 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감히 너 따위가 알긴 뭘 아냐고 한대도 눈 하나 꿈쩍 안 할 정도로 생각이 든다. 감정이 파도치고 소용돌이 치고 눈물이 나도 내 감정과 눈물은 그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다. 내 슬픔과 기쁨은 다른 사람들에겐 그냥 길을 걷다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같은 거다. 아무 기억도 나지 않거나 몇 초 흥얼거리거나. 세상엔 아무 것도 없다.]
약 보름 전 쓴 메모다. 난 어느 순간부터 예전보다 말 수가 사라졌다. 터닝 포인트 같은 건 없고 이유는 저 메모에서 처럼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걸 알게 돼서였다.
‘달과 6펜스’에서 서머싯 몸은 말한다. ‘우리는 마음속에 품은 소중한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고 안타까이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나란히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언제쯤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는거냐. 난 외로운 사람들이 이입되는데 외로운 사람들은 사람들이 외면 하잖아. 나만 해도 어떤 사람들은 외면하지. 그리고 그냥 혼자 사는 거야. 그러면서 또 이기적으로 남한테 사랑을 왜 안 주냐고 평생을 고함지르다가 죽는 거야. 이게 남도 그렇고 나도 그런거야. 이렇게 치사한 인생인거지.] 얼마 전 친구에게 나의 마음을 이렇게 적어서 보냈다.
4
안 믿을 수도 있겠지만 가끔 사람들이 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까봐 겁이 났다. 오죽하면 나의 방식과 그걸 사랑해주는 사람들끼리 마을을 만들어서 살고 싶다는 상상도 했었다. 내가 이렇게 약했던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계속 이래왔던 것 같다. 왜냐면 난 ‘사랑해’라는 말을 나는 하면서 늘 누군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할까봐 겁이 났었다. 그 말에 부응할 만큼 내 자신이 좋은 사람인지에 대한 확신도 들지 않았고 내 마음의 크기도 상대방 만큼의 사랑이 맞는지에 대한 애매함도 나에겐 괴로웠기 때문이다. 요즘엔 ‘그대는 너무 솔직해서 비밀이 많군요’라는 노래 가사가 자주 생각난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더 솔직해지고 더 많은 비밀이 생긴다. 어릴 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그 비밀들을 누구와 어떻게 공유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점점 더 뻣뻣하고 건조한 인생이 되어 무표정으로 많은 날들을 지내지만 나도 그렇고 모두가 사랑 앞에서 약하다는 걸 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이 약하고 많이 외롭다. 그래서 많은 위로와 사랑이 필요하다. 얼마 전엔 친구와 통화하면서 ‘사람들 다 역겨워, 근데 불쌍해’라고 말했다. 인생은 치사하고 인간은 역겨우면서도 불쌍하다는 것. 내가 아는 건 이 사실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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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제목은 ‘스틸 라이프 (Still Life)’다. 원더풀 라이프, 브라보 마이 라이프 말고 스틸 라이프. 언젠가 이 제목으로 꼭 작업을 하고 싶었다. 파도 하나 일지 않는 호수같은 라이프. 스틸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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