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아직도 네 아빠를 믿니, 2020
넌 아직도 네 아빠를 믿니
그게 내가 엄마한테 제일 자주 들은 말이었어. 그래서 난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한다는 것도 믿지 못했어. 엄마가 뭘 잘못해서 아빠랑 같이 사는 줄 알았지. 근데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라는 거야. 그 얘기를 처음 들을 때 속으로 생각했어. 어? 아닌데? 우리 엄마 아빠 서로 안 사랑하는데? 참 이상하지. 근데 결혼식은 또 했더라. 둘이 입 맞추는 사진도 있어. 진짜 남들처럼 드레스 입고, 턱시도 입고. 젊었더라. 아니 어렸다고 해야 맞겠다. 물어봤어. 엄마는 아빠 좋아해? 빨래를 탁탁 개면서 그러더라. 좋아하긴 개뿔. 철없을 때 뭣도 모르고 시집온 거지. 그러면 그때는 좋았냐고 물으니까 기억 안 난대. 근데도 밥은 꼬박꼬박 다 챙겨주더라. 근데도 그 말을 늘 했어. 넌 아직도 네 아빠를 믿니.
언제 아빠가 내년 초에는 다 같이 제주도에 가자고 했어. 해외는 못 가도 제주도는 가보자고. 나는 설레서 제주도 여행 코스 바로 검색했지. 보니까 제주도는 보통 시계 방향으로 돌지, 반시계 방향으로 돌지 먼저 정하더라고. 엄마한테 물어봤어. 어느 쪽으로 돌고 싶냐고. 근데 엄마가 그러더라. 제주도 안 가니까 그거 그만 보라고. 왜? 아빠가 내년에 제주도 간다고 했잖아. 안 가. 왜 엄마 제주도 가는 거 싫어? 엄마가 아니라 네 아빠, 말만 하고 안 갈 거니까 그런 줄 알아. 행여 가게 되면 그때 알아봐. 지금 알아보지 마. 엄마 표정이 지긋지긋해 보이더라. 그래도 가끔씩 생각나면 여행 코스 검색해서 보고 그랬어. 맛집도 미리 알아놓고. 그러고 내년이 됐지. 근데 있잖아. 진짜 엄마 말대로 아빠가 제주도의 ‘제’자도 안 꺼내더라. 그래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어. 아빠 우리 제주도… 아빠가 물잔을 내려놓고 그러더라. 다음에, 봐서. 그러고 그냥 방에 들어갔어. 엄마가 나를 안쓰럽게 쳐다봤어. 잊지 그랬어. 왜 믿었어.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어.
고등학생 때였어. 야자를 했는데, 끝나면 10시였어. 근데 그러고 또 학원에 갔어. 학원까지 걸어가고, 한 시간 수업하고, 다시 집으로 걸어가면 12시였어. 캄캄한 골목을 지나서 집에 들어가면 작은 불이 켜져 있었어. 부엌 불. 엄마는 소파에서 선잠을 자고 있었어. 아빠는 안방에서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고. 엄마는 내가 들어가는 소리에 잠에서 깨서 이제 왔니, 밥은 먹었니, 춥지, 내일 아침엔 뭐 먹을래 같은 말들을 했어. 샤워를 하고 간단하게 요기를 하면 엄마는 그제야 잠드셨어. 그 와중에도 설거지는 아침에 본인이 할 테니 담가 만 놓으라고 하셨지.
그런데 어느 날은 돌아왔는데 집이 캄캄한 거야. 엄마가 깜빡 잠에 드셨나 보다 싶어서 나는 조용히 씻고, 잠들었어. 그러고 일어났는데 엄마가 심통이 난 상태로 밥을 차리고 있는 거야. 어제 몇 시에 들어왔냐고 물어서 평소랑 똑같이 왔다고 말했어. 어제도 엄마가 부엌 불을 켜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대. 그걸 보고 아빠가 뭐 하는 거냐고 불 끄라고 했대. 전기세 나간다고. 그래서 엄마가 나 아직 안 왔다고 말했대. 근데 아빠가 그랬대. 알아서 올 때 되면 오겠지. 엄마가 기가 차서 올 때 되면 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애가 왔는데 집이 컴컴하면 되겠냐고 말했는데, 아빠가 화를 냈대. 컴컴하긴 뭐가 컴컴해 다 보이는데. 그러고선 아빠가 불을 꺼버렸대. 엄마는 그 와중에 다 보이나 싶어서 어둠 속에서 가만히 눈을 뜨고 있었대. 근데 너무 캄캄했대. 보이질 않았대. 그런데 불을 켜면 아빠가 또 화를 낼 거니까 그냥 잠들었대.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더라. 괜찮다고 했어. 불 좀 꺼져있으면 어때. 나 눈 좋아서 잘 보여.
전기세를 아껴서 아빠를 미워했냐고? 아니야. 난 그런 모습을 미워했던 게 아니야. 중요한 건 그다음이야. 그러고 나서 하루는 아빠가 술을 거하게 마셨어. 엄청 취하셨더라고. 번호 키를 누르는 속도가 느렸어. 엄마가 갑자기 그러더라. 나보고 방에 들어가서 자는 척을 하래. 떠밀려서 방에 들어가는데, 엄마가 갑자기 집안 불을 다 끄더라. 그리고는 엄마도 티비를 끄고 자는 척을 했어. 그때 아빠가 들어왔어. 그리곤 이렇게 말했어. 뭐 집을 이따위로 컴컴하게 해놓고, 불을 켜놔야 될 거 아냐. 사람이 오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더라. 무언가가 끊어진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싶었어. 그날 나는 한숨도 못 잤어. 그 말이 계속 귓속에 떠돌았거든. 화? 화 안 났어. 포기했지.
근데 살다 보니까 나는 양반이던데? 폭력적인 아빠, 도박하는 아빠, 바람피우는 아빠, 무능한 아빠. 이기적인 아빠는 어디 비빌 것도 아니더라. 근데 그렇다고 ‘아유 이기적이기만 하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하면서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나도 엄마도 사람이니까. 상처받는 건 똑같았어. 그런데 아빠가 서운해하더라.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다고. 존경. 아빠는 자신이 우리를 먹여 살리려고 힘들게 일을 하고 있다고 얘기했어. 듣다 듣다 화가 나서 이야기했어. 그만 좀 하라고. 나도 일을 나가고, 엄마도 청소하러 다니는 거 안보이냐고. 아빠 혼자 힘드냐고. 우리도 아빠처럼 밥 먹을 때 밥 먹고 잘 때 자고 일어나면 일 나가고 그런다고. 아빠가 그제야 말을 아끼시더라.
정말 많은 시간을 아빠를 미워하면서 살았어. 언제는 엄마한테 말한 적도 있었어. 원망 안 할 테니까, 이혼하고 싶으면 이혼해도 된다고. 나 똑바로 살 자신 있다고. 엄마가 됐대. 이제 와서 무슨 이혼이냐고, 동네 흉 된다고 안 한 대. 남들 눈이 무슨 상관이냐고 했는데 그냥 살겠대. 아빠가 불쌍하대. 웃기지. 나는 엄마가 팔려온 줄 알았는데. 왜 엄마가 이혼하면 좋겠어? 아니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엄마가 그냥 웃더라. 그리고 엄마는 그날 갈비찜을 해줬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 아빠 미워하지 마. 아빠한테 그러는 거 아니야. 엄마도 참. 나한테 아빠 흉본 건 본인이면서. 아무튼 난 그렇게 두 개의 미션을 갖게 됐어. 아빠를 믿지 않을 것. 그렇지만 미워하지 않을 것. 다른 사람이 준 미션이면 좆까라고 했을 텐데, 어떡해. 엄마가 하라는데. 그래도 사랑해야된다는 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아무튼, 그래서 최대한 그래보고 있는 중이야. 상처 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으면서. 제주도 얘기를 지금도 가끔 해. 또 내년에 가재. 도대체 그 내년은 언젠지. 화목한 거 그거 어려운 거더라. 가화만사성.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된다. 그 말, 난 그 말 안 믿어. 근데, 그 말 만든 사람까지 미워하진 않으려고. 그냥. 미워해서 뭐해. 근데 너네 집도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