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인사 두 번째 학교, 2020
첫 번째 인사, 두 번째 학교
엄마가 현관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보경아, 미용실 가서 머리 좀 다듬고, 목욕만 하고 오자, 응? 보경은 식탁 근처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갔다 오면 기분 좋잖아. 싫어? 보경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고개를 겨우 들고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보경이 말했다.
“엄마… 안 가면 안 돼?”
“…그래 그러면 쉬자 집에서.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아니… 미용실이랑 목욕탕 말고. 학교.”
내일, 보경은 학교에 간다. 보경의 두 번째 고등학교. 학교를 이동하는 건 쉽지 않았다. 처음엔 담임 선생님과 상담을 했고, 담임 선생님이 엄마와 상담을 했고, 다시 엄마와 보경이 며칠 동안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다시 엄마가 선생님께 이야기를 하고, 보경이 다양한 종이에 서명을 한 다음 엄마가 챙겨주는 서류들을 챙겨서 교무실에 제출해야 했다. 그 번거로운 절차를 모두 마치고 이제 두 번째 학교에 가는 날인데, 보경은 가기가 싫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엄마도 따라 눈물을 흘렸다. 보경아 힘들지. 그래도 고등학교는… 가야 되지 않을까? 많이 가기 싫어? 보경은 그렇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더 많이 울었다. 그렇다고 말하면 엄마가 보경에게 져줄 것 같았는데,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엄마가 지는 것 말고 보경이 이겨내서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용기를 내서 미용실에 들어갔다. 엄마가 자주 가는 미용실. 미용실 사장님은 짙은 갈색 머리에 오래전 한듯한 아이라인 문신이 인상적이었다. 미인 타입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인 밸런스가 조화로웠다. 무엇보다 다른 미용실 사장님들처럼 과하게 사근사근하지 않은 게 장점이었다. 그래서 언제 가도 대기 손님이 2-3명 정도 있었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보경은 편하게 의자에 앉았다. 살짝 눈을 찌르는 앞머리, 신경 쓰지 않고 살아 많아진 숱. 사장님은 보경의 머리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냥 조금만 다듬어줘요. 애가 내일 개학이라”
“아 그렇구나. 그럼 내가 이쁘게 해줄게요. 우리 딸이 요즘 한 머리가 이쁘더라고”
사장님은 샴푸부터 하자고 했다. 부드러운 손길이 보경의 머리를 감쌌다. 보경의 긴장감이 서서히 풀렸다.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앞머리가 잘려나갔다. 살짝만 다듬었을 뿐인데 엄청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이후로 여기저기 핀이 꼽히고 사장님께서 머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가위질을 했다. 소파에 엄마가 앉아있었다. 엄마는 잡지를 펼쳐만 놨지 계속해서 거울 속 보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보경은 계속해서 누가 오진 않을까 바깥에 신경이 가있었다. 누군가가 고등학생 씩이나 돼서 엄마가 가는 미용실에 따라와서 머리를 자르고 있다고 비웃을까 봐 두려웠다. 머리가 많이 잘리는 것 같기도 했고, 잘리기는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한 40분쯤 지났을까. 사장님이 드라이어로 말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머리의 모양이 갖춰졌다. 중간마다 과하지 않은 층이 생겼고, 덥수룩했던 머리가 가벼워졌다. 보경은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아줌마 마음에는 드는데 우리 따님은 어때? 괜찮아요. 좋아요. 사장님이 보경의 반응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제품을 찾아 발라주려는데, 보경이 다급히 괜찮다고 했다.
“목욕하러 갈 거라서요…”
“얼마나 좋은 학교길래 때 빼고 광내고야?”
사장님이 보경을 귀여워하며 말했다. 보경은 고등학교를 말했다. 어? 우리 딸 거기 다니는데. 사장님이 말했다. 만약에 보면 인사해요. 열여덟이라며 그럼 우리 딸이랑 동갑이야. 우리 딸 사진 보여줄게. 사장님이 핸드폰을 열어 사진을 보여줬다. 부리부리하게 생겼는데 웃는 모습이 예쁜 얼굴이었다. 보경은 인사를 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사장님께는 그러겠다고 말했다. 목욕탕에는 아주머니들이 더러 있었다. 오랜만이어서 조금 어색했다. 엄마의 알몸이 눈에 스칠 때마다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언뜻 봤을 때 엄마는 작년보다 더 마른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치고 탕에 들어갔다. 엄마는 눈을 감고서 말했다. 보경아 저녁은 뭐 먹고 싶어. 보경은 냉장고를 생각했다. 제육볶음. 보경이 말했다.
“냉장고에 있는 거 얘기 안 해도 돼 보경아. 오늘은 보경이 먹고 싶은 거 먹자”
엄마가 보경을 슬프게 바라봤다. 보경은 머쓱했다. 그러면 나 떡볶이. 깻잎 많이 넣은 떡볶이. 조금 밝은 톤으로 말했다. 나가서 바나나 우유를 마시며 마트에 갔다. 엄마는 보경과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TV를 켜고 엄마의 요리를 도왔다. 비록 재료의 포장을 뜯고, 숟가락을 휘휘 젓는 것뿐이었지만 엄마는 고맙다고 말했다. 식탁에 앉아 떡볶이를 먹었다. 별다른 대화 없이 TV소리만 있었다.
“보경아 이번에도… 그런 일이 생기면, 엄마한테 꼭 얘기해줘”
이번에도 그런 일이 생기면. 보경은 자신이 하던 걱정을 엄마가 짚어줘서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몇 배로 불안해졌다. 그렇다. 또 생길 수 있는 일이다. 보경은 떠올렸다. 기술 가정 시간이었다. 나무로 된 선반을 만들었다. ‘나무 선반 만들기’키트가 준비물이었다. 모두가 똑같은 키트를 가지고 실습을 시작했다. 모두가 같은 재료로 만들기 시작했지만 모두가 같은 선반을 만들어낸 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사포질을 잘못해서 어딘가 엉성했고, 누군가는 평행이 안 맞았다. 그런 면에서 보경의 것은 거의 완벽했다. 손으로 무언갈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만큼 순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포질을 하다 붙은 나무 먼지를 씻으러 화장실에 다녀왔다. 선반을 봤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모서리가 과하게 뭉툭했고, 나사가 엉성하게 조여져있었다. 보경은 선반을 공중에 들고 요리조리 살펴봤다. 보경의 선반이 아니었다. 뭐지? 보경은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반에서 어떤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얼굴이 하얗게 뜨고 고데기로 잘 만진 머리를 한 여자애.
“왜 무슨 일 있어?”
“선반이 내게 아니야”
“다 똑같은 거 만들고 있는데 내걸 어떻게 알아? 이름도 안 써 놨잖아”
“…이름이 안 쓰여있다고 내걸 모르진 않아”
보경은 엉성한 선반을 제출했다. 보경의 수행평가 점수는 10점 만점에 6점의 점수를 받았다. 그 여자애는 10점이었다. 그날 보경은 오후 수업 내내 엎드려 있었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말하고 조퇴를 했다. 다음 날, 보경의 물건이 하나씩 사라졌다. 시작은 그랬다. 그러다 사물함에 쓰레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보경이 가장 수치스러워했던 순간은 급식실에서 넘어졌을 때였다. 분명 발에 뭐가 걸렸었다. 툭. 뭔가가 채이고 급식판은 하늘로 솟고 보경은 앞으로 넘어졌다. 그때 보경은 들었다. ‘아 존나 영화 같은 데서 만 봤는데 실제로 보니까 존나 웃기다’ 그날부터 보경은 급식을 먹지 않았다. 학생 때 가장 하기 힘든 말들 중 하나였다. 수학여행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과 급식을 먹지 않겠다는 말. 그 말들은 설명을 필요로 했고, 설명은 대부분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말해야 했다. 사람은 다 혼자 산다고 하지만, 그 나이 때에는 필사적으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게 당연했다. 보경은 학교라는 곳에서 혼자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엄마는 애써 웃으며 보경에게 새 학교 교복이 잘 어울린다고 했다. 새 학교는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야 했다. 전학생이면 인사를 하라고 하겠지. 그럼 난 교탁 앞에서 애들의 시선을 받겠지. 보경은 그 상황을 상상하며 연습했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교문을 들어갈 때도 몇몇 아이들이 보경을 힐끔거렸다. 보경은 최대한 정면만 바라봤다. 원래 같으면 긴 앞머리로 자신의 눈을 숨겼을 텐데, 어제 잘라버린 탓에 불가능했다. 엄마가 그 자세를 없애기 위해 미용실에 데려갔던 거구나. 보경은 늦게 깨달았다.
교무실에 들어갔다. 담임 선생님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함께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리고 보경과 같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빼곡히 앉아있었다. 안녕, 나는 신보경이라고 해. 아이들과 어색하게 첫인사를 나눴다. 아이들은 작게 손뼉을 쳤다. 보경은 중간쯤 되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선생님이 나가고 한 여자애가 옆에 와서 섰다. 어디에 사는지, 전에는 어디 학교를 다녔는지 같은 것들을 물어봤다. 보경은 최대한 친절하고 튀지 않게 하나하나 설명했다.
“아…근데 뭐야, 나 모르겠어?”
보경은 식은땀이 났다. 누구지? 어떻게 모르겠냐는 말을 하지? 보경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학원에서 만났던 앤가? 뭐지? 아냐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보경은 여자애를 봤다. 어딘가 익숙한 헤어스타일. 어제 사진 속의 그 애였다. 미용실 사장님 딸. 명찰을 보니 이름이 외자였다. 청. 사진과 정말 똑같이 생겼는데 왜 몰랐을까 했더니 헤어스타일이 달랐다. 사진 속에선 단발이었는데, 지금은 날개뼈 정도까지 길어있었다. 청의 친구인듯한 여자애 한 명이 슬며시 옆에 섰다. 너랑 머리가 비슷하다. 우리 엄마가 잘라줬거든. 청의 친구들은 살짝 놀라며 깔깔깔 웃었다. 오래간만에 가까이에서 들은 웃음소리였다.
“근데, 왜 전학 왔어?”
청의 친구가 물었다. 대답을 수없이도 준비했던 말인데, 준비와는 상관이 없었다. 대사와 목소리가 아니라 용기가 필요했다. 그게 있잖아… 개인… 적인… 사정… 망했다. 딱 봐도 사정이 복잡해도 너무 복잡해서 ‘개인적인 사정’이라고 말하는 게 티가 났다. 그럼에도 청과 친구들은 웃었다. 그렇구나 개인… 적인… 사정… 이구나라면서 보경을 따라 했다. 보경도 피식 웃었다. 청의 친구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청이 보경에게 가까이 와서 속삭였다.
‘그러니까 당하고 살지 병신아’
보경은 소름이 돋았다. 이 말은 뭘까. 청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엄마가 말했나. 미용실 사장님… 사장님이 안 거야. 사장님은 어떻게 알았을까. 보경의 시선이 불안정해졌다. 여기서도 반복될까. 청을 쳐다봤다. 청이 씩 웃었다. 저 웃음은 뭘까. 저 아이는 착한 아이가 아닌 걸까. 순간 보경의 선반을 가져갔던 여자애와 겹쳐 보였다. 사장님은 친절하셨는데. 보경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었다. 이윽고 수업 종소리가 울렸다. 낯선 음들이 보경의 귀에 들렸다. 보경을 제외하고 모든 아이들에겐 익숙한 종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