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세이브 앤 리셋 (Save and Reset), 2020

이상은 2021. 8. 6. 15:37

세이브 리셋 (Save and Reset)

 

“그걸 벌써 버렸어?” 

 

병운이 말했다. 이전 남자친구 상우도 선영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걸. 벌. 써. 버. 렸. 어. ?” 이 문장의 포인트는 ‘버렸어?’가 아니라 ‘벌써’에 있다. 왜 벌써 버렸니? 글쎄, 왜 벌써 버렸을까. 솔직한 말로는‘네가 다시 날 찾을 줄 몰랐어’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선영은 이미 모범 답안을 뱉고 있었다. 힘들어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대답이었다. 힘들긴 했지만 못 견딜 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선영이 벌써 버린 물건은 지갑이었다. 헤어졌어도 그렇지 지갑을 굳이 버릴 필요가 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지갑은 선영도 있다. 조금 헤지긴 했지만 돈이 빠질 정도로 헐거워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쓰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영은 병운이 선물해 준 지갑을 버리고 다시 그 지갑을 꺼내서 썼다. 물론 병운도 선영의 지갑이 불편해 보여서 사준 건 아니고, 선영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병운과 헤어지기 전 데이트를 하던 때였다. 병운은 카페 탁자 위에 놓인 선영의 지갑을 만지작 만지작 하더니 ‘쓴 지 얼마나 됐어?’라고 물었다. 그러고는 다음 달 중순 선영의 생일에 병운은 선영에게 갈색 가죽 지갑을 선물했다. ‘바꿀 때 된 것 같아서’라는 말과 함께.

 

그렇게 지갑을 선물 받고 석 달이 지났을까, 무더운 여름에 둘은 헤어졌다. 병운이 선영게 헤어지자고 했다. 기약없이 길어지기만 하는 이직 준비로 자신한테 집중을 해야 할 것 같고, 재정적인 부분도 부담스럽다며 이별을 제안했다. 그런 부분이라면 선영은 자신이 더 감당할테니 이별은 재고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병운은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바로 그날 지갑을 버렸다. 그런데 이렇게 또 병운과 마주 보고 밥을 먹게 될 줄이야.

 

병운의 끝날 줄 모르던 이직 준비가 끝이 났다. 연애할 때부터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회사가 있었는데, 결국 그 회사에 입사를 했다. “축하해”라고 말하니 병운은 밝게 웃었다. 뭔가 오랜만에 보는 미소라는 생각이 들어 잠깐 마음이 시렸다. 빈 그릇을 싱크대에 담가 놓고, 병운은 설거지를 하면서 말했다. 

 

“다다음 주부터 출근이니까 그동안 데이트 많이 하자. 바다 보러 갈까?” 

 

선영은 순간 그 말이 병운의 말이 아니라, 이런 상황이 되면 모든 사람이 뱉는 아주 통상적인 말이라는 느낌을 받았지만 싱긋 웃어 보이며 그러자고 대답했다. 그렇게 병운과 선영은 2주 동안 열심히 데이트를 했다. 정말로 바다도 보러 가고, 집에서 요리도 해먹고, 이케아도 구경하고, 영화관도 가고, 산책도 했다. 병운의 출근이 시작되고, 한 한달쯤 지났을까. 병운은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회사를 점점 미워하기 시작했다. 일이 너무 힘들고 많다고 자주 말했다. 당연히 만나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연락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어나서 하던 연락은 점심을 먹을 때로 늦춰졌고, 집에 도착해서 하던 시시콜콜한 하루 일과 얘기는 [나 먼저 자볼게]라는 문장으로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우리 회사는 연차를 돌아가며 가야 했고, 이번엔 선영의 차례였다. 그동안 여행 한 번 가지 않고 일만 했던 선영은 약 1주의 연차를 받았다. 여행을 갈까 생각했지만 병운과 그러지 않아도 데이트를 할 시간도 없던 요즘을 생각하며 병운에게 시간을 맞추기로 했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휴식을 취하다가 병운의 퇴근 시간에 맞춰 병운의 집에서 저녁을 하고 기다리는 그런 거. 병운의 힘든 회사 생활을 위해 선영은 자신의 휴가 시간을 그렇게 쓰기로 했다. 

 

[나 다음 주까지 연차여서 내가 시간 맞출게 병운 씨] 

 

[좋겠네 자기는. 나 놀리는 거지]

 

꼭 말을 해도…. 잠깐동안 핸드폰을 아니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연차 1일차. 병운의 집에서 잠을 잤다. 병운이 출근 준비를 하는 소리에 깼고, 병운은 여전히 누워있는 선영에게 말했다. 더 자, 선영아. 이따 퇴근하고 저녁 먹자. 선영은 대답도 못하고 눈도 못 뜨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선영이 일어난 건 정오가 넘어 햇살이 방을 비출 때였다. 병운의 집은 오랜만이었다. 다시 만나고 처음 오는 거니까 6개월 만이었다. 오랜만에 집을 구경했다. 그대로인 게 많았다. 여전히 옷장 왼쪽엔 병운이 뿌리는 향수가 장식장 위에 놓여있었고, 냉장고엔 병운이 여행을 다니며 모은 마그넷들이 전에 선영이 봤을때와 같은 위치에 붙어있었으며 거실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사용한다는 턴테이블도 그대로 있었다. 게다가 오늘에서야 인식한 건데, 화장실에는 예전에 선영이 병운에게 선물로 사준 무인양품 칫솔꽂이도 그대로 있었다. 거기엔 병운의 칫솔이 꽂혀 있었다.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는데, 여전히 병운에게 남아있는 자신의 물건들을 보니 얼마 전 병운이 선영에게 ‘그걸 벌써 버렸어?’라며 서운함을 토로하던 게 좀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괜히 미안한 기분에 사로잡혀 병운의 집의 청소하기로 했다. 병운이 지저분한 타입은 아니지만 일이 바쁘니 병운도 청소에 신경을 못써 곳곳에 먼지가 쌓여있었다. LP를 하나 골라 재생시킨 후, 먼지떨이를 집었다. 곳곳의 먼지를 털어낸 후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로 마무리를 하는데 노래가 끝이 났다. 잠깐 고요해진 집 안에서 청소를 마무리하려는데, 병운의 책상 서랍에 찢어진 포장지가 있었다. 거기엔 ‘생일 축하하고 사랑해 오빠’라는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선영과 병운은 동갑이다. 게다가‘사랑해’라는 말이 쓰여있으니 누군가와 연애를 하던 시기에 받은 것이었다. 맥이 빠졌다. 여태껏 청소는 왜 했지. 찝찝해진 기분을 모르는 체하려 다시 음악을 재생시키기로 했다. LP 판을 하나하나 넘겼다. 거기엔 병운이 좋아하는 쳇 베이커의 LP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판을 올려놨다. <I fall in love too easily>가 천천히 흘러 나왔다. 제목도 지 같네.

 

병운은 8시 반쯤 집에 돌아왔다. 선영은 카레를 해놨고, 병운은 넥타이만 푸르고 앉아 카레를 먹었다. 병운은 나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카레를 먹었다. 카레를 다 먹은 병운은 샤워를 하러 들어갔고, 선영은 설거지를 했다. 씻고 나온 병운은 캔맥주를 딴 뒤 내 옆에 앉았다. 

 

“내일은 뭐해?” 

 

선영은 생각했다. 나 내일 뭐 하지? “그러게. 오늘처럼 보낼 것 같은데…”라고 대답하니 병운은 약간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주일이나 휴가 받았으면 나라면 바로 여행 갔다” 뭔가 그 말은 기분이 나빠지는 말이었다. 나도 여행 생각 안 했던 거 아닌데. 선영은 순간 오르는 열을 눌렀다. 병운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아 근데 뭐.. 자기 일은 그래도 업무 강도가 괜찮으니까, 여행까지 가면서 쉬지 않아도 되겠네. 아 난 진짜 다닐수록 더 힘든 것 같아"

 

난데없이 ‘나라면 바로 여행 갔다’로 시작해서 ‘난 진짜 다닐수록 더 힘든 것 같아’라고 하는 병운의 말 에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선영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병운은 문득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약간 당황함을 묻힌 말투로 청소를 했냐고 물었다.

 

“뭐 버린 건 없지? 그냥 청소기만 돌리고 닦기만 한 거지?”

 

“내가 병운 씨 물건 뭘 알아서 버리고 말고를 결정하겠어”

 

병운은 안심한 표정으로 예쁘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청소도 하고 카레도 해놓고, 이쁘네 우리 선영이. 선영은 다음 날 병운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 병운이 출근하자마자 집안 곳곳을 뒤졌다. 여자들의 흔적을 찾아내고 싶었다. 어제 열었던 서랍부터 보았다. ‘사랑해 오빠’포장지를 걷어내니 카드가 있었다. [카메라에 대해 잘 몰라서 그냥 상태 가장 괜찮아 보이는 걸로 샀어. 여행 갈 때 이쁜 사진 많이 찍어와!] 카메라? 아. 필름 카메라. 병운은 여행을 가기 전마다 ‘필름 카메라 하나 살까’하는 말을 가끔씩 했었다. 선영은 자신의 카메라를 빌려 가라고 몇 번 했었지만 정말로 빌려 가지는 않길래 습관처럼 내뱉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이 여자는 그 말을 기억하고 정말로 병운에게 카메라를 사준 거였다. 그래,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병운의 SNS에 필름 사진들이 업로드됐었다. 그래, 맞네.

 

카드를 몇 개 더 찾아 읽으며 물건을 찾았다. 물건은 찾을수록 눈에 더 잘 보였다. 병운의 취향에서 살짝 벗어나는 것들을 찾으면 됐다. 슬슬 카드가 없어도 물건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넥타이, LP 3장, 노트북 파우치, 엽서, 디퓨저까지. 더 찾으려면 더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만 찾고 싶었다. 선영은 자신이 선물해 준 물건들을 한 번씩 다시 바라봤다. 그것들은 어제의 모습과 달랐다. 어제는 당당하고 아름답고 뿌듯했지만, 오늘은 모든 것과 같아 보였고 눈치 없어 보이며 아무런 뿌듯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주인공 역에 캐스팅만 됐지 다른 배우에게만 조명이 비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병운은 어제와 같은 시간에 집에 돌아왔다. 병운과 선영은 맥주를 마시며 TV를 봤다. 선영이 병운에게 물었다. 

 

“병운 씨. 내가 지갑 버린 거 많이 서운했어?”

 

“아니 그걸 왜 버리냐 멀쩡한걸” 

 

병운은 이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자기는 평소엔 감성적인 것 같은데 그럴 때 보면 정말 냉혈한 같아. 어떻게 나를 그렇게 빨리 잊냐. 어떻게, 그렇게? 선영은 그 단어들이 거슬렸다. 선영은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한 후 말했다. 병운 씨는 그냥 물건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잖아. 병운은 TV에서 완전히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뭔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다른 여자들 물건도 많더라”

 

“근데”

 

“내가 냉혈한? 병운 씨가 나르시시즘에 박애주의 자겠지. 순수하고 낭만적인 척 하지마”

 

병운은 짜증 난다는 듯 머리를 쓸어넘기며 그럼 그걸 다 버리냐고 말했다. 그럼 그걸 다 갖고 살게? 병운은 대답 대신 맥주를 마셨다. “넌 진짜 애가 왜 그러냐? 그래도 저 사람들도 네가 좋아하는 나, 좋다고 준 거야. 나한텐 소중하다고” 그러면 나는? 나는 안 소중한가? 내가 찾아볼 수 없는 곳에다 꼭꼭 숨길 순 없었던 걸까? 서랍만 열면 볼 수 있던 그 쉬움이 날 아프게 했던건데. 병운은 맥주를 털어 마셨다. 

 

“그리고, 왜 뒤지는데” 

 

선영은 더 대답하지 않고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 화가 나서 그런지 엘리베이터가 갑갑한 공간으로 느껴졌다. 핸드폰엔 병운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무시하고 택시를 탔다. [너 할 말만 다 하고 가버리는 게 어딨어. 전화받아] 이건 정말 최악의 휴가야. 선영은 핸드폰을 열어 병운의 번호를 삭제하고 찍은 사진들을 삭제했다. 이어서 최근 삭제된 항목에도 들어가 전체 삭제를 했다. 병운과의 연결들이 핸드폰에서 빠져나갔다. 그제서야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병운이 집 앞으로 왔다. 별스럽지 않은 말로 대화를 빙빙 돌다가 병운이 운을 뗐다. 

 

“넌 지갑 그럼 왜 버린 건데. 나에 대한 마음 다 끝났던 거 아냐?” 

 

“끝내고 싶어서 버린 거지. 끝나서 버린 거 아니었어”

 

“……”

 

“병운 씨는 아직도 내 말을 이해 못 한 것 같아. 그냥 그 소중한 물건들이랑 오손도손 잘 살아”

 

병운은 말이 없었고, 선영은 그런 병운을 뒤로한 채 돌아왔다. 며칠 전 병운이 준 백합을 들어 바로 쓰레기통에 넣었다. 백합은 왜 향기도 진한지. 쓰레기통에 넣어도 향기가 났다. 백합 향이 빠지기를 바라며 창문을 열었다. 어제도 나지 않던 눈물이 보이지도 않는 백합 향에 터져버렸다.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하고, 병운 씨는 왜 그렇게 둔감한 걸까. 한참을 울다 정신을 차리니 저녁 9시였다. 핸드폰엔 아무 연락도 와있지 않았다. ‘그만 만나자’ 혹은 ‘헤어지자’라는 문장 없는 헤어짐이었다. 선영은 쓰레기봉투를 꽁꽁 묶었다. 백합 향이 새어 나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더 세게 묶었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분리수거장에 갔다. [일반 쓰레기] 통에 쓰레기봉투를 조심히 넣었다. 그리고 한참을 그 앞에 서있었다. 어제 병운을 뒤로하는 것보다 이 [일반 쓰레기] 통을 뒤로하는 게 어려운 건 왜일까. 선영은 어렵게 등을 돌렸다. 집에서는 더 이상 백합 향이 나지 않았다. 백합 향이 나지 않는 집이라니. 집에서 백합 향이 나야 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책상 밑 쓰레기통은 다시 빈 통이 되었다. 

 

“병신 새끼, 내가 어디가 냉혈한이라는 거야” 

 

나머지 휴가 동안은 영화를 보거나 요리를 해먹고 친구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분노와 슬픔이 가끔씩 흘러들어왔지만 시간은 멀쩡히 잘 흘러갔다. 그리곤 다시 회사, 다시 점심시간이었다. 메뉴를 시키고 기다리는데 선배가 그래도 일주일 쉬었다고 얼굴이 밝아졌다며 스몰토크를 던졌다. 음식이 어느 정도 사라지고 배가 조금 불러올 즈음에 선배가 젓가락질을 멈추고 말했다. 

 

“일주일 동안 뭐 했어?”

 

 “음… 청소했어요, 청소”